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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롭다고 깜빡 속을 뻔

퇴사 D-39

by 푸른국화

10월 말까지만 다니는거야.

라는 마음을 먹었던 첫 날. 그 때는 하루하루 고통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나갈 마음을 먹어서인지, 하루씩 리셋되는 탓인지 근래는 또 다니려면 계속 다닐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도 듭니다. 퇴사의 이유는 단편적인 이유 하나만은 아니었지만, 깊이 고민해서 결론을 내렸더라도 당장 내 몸 힘들지 않으면 현실에 안주하려는 의지가 훨씬 강합니다. 더군다나 퇴사처럼 생계에 관련된 직접적인 문제는 합리적 이유가 백가지라도 월급 앞에서 모두 무시되기 십상입니다.


퇴사날짜가 다가오니 더더욱 현실적인 문제가 커지고, 그러다 보니 평화로운 이 시기에 굳이 퇴사가 맞을까, 연말까지 다니면 안 될까, 아니 지금 사장님 임기까지는 다녀볼까 하는 유혹에 흔들립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오늘 오후에 감사실로부터 소환 전화를 받았습니다.

"팀장님, 외근 중이셔서 부득이하게 폰으로 전화드렸습니다."

"네, 무슨 일이신가요?"

" OO은행 소송건으로 전화드렸습니다. 내일 진술하시러 오셔야 하는데 언제 괜찮으세요?"

"저요? 저 조사받나요?"

"부담갖지 마시고 편하게 오셔서 허심탄회하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제가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곤란하실텐데요. 내일 출근하자마자 조사받으러 가겠습니다. 내일 오후도 외근이 있어서요."

"아, 저희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해서, 9시30분 괜찮으실까요?"

"네, 내일 9시30분에 뵙겠습니다."


굉장히 불쾌했습니다. 감사받으러 오라해서 불쾌한 게 아니라, 이 사건에 연루되는 게 불쾌했습니다. 이 사건은 사실 소송을 하지 말았어야 할 사건이었습니다. 우리회사가 OO은행에 지급해야할 금액과 지급요건이 버젓이 계약서에 기재되어 있는데 그 돈을 안 준다고 버티다 이자에 소송비용까지 물어준 사건입니다. 그것도 쌍방 대형로펌을 쓰는 바람에 소송비용도 어마어마하게 들었습니다. 제가 입사하기 전에 이미 우리회사가 1심 패소하여 선고금액 공탁하고 항소심까지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항소심이 한창 진행 중에 제가 입사했고 이 사건은 이렇게 풀어서는 안 된다고 저와 소송대리인이 한 목소리를 냈지만 불순한 의도에 가뿐히 묵살되었습니다. 그래서 소송을 진행하는 것 자체가 몹시 힘들었던 사건입니다. 그나마 소송대리인에 의지하며 몸은 덜 힘들었지만 마음고생은 굉장히 심했습니다.

소송 종결 후 후속조치도 힘들었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아래 이 사건입니다.


https://brunch.co.kr/@spring0802/234

부장 둘은 저를 이용해 사장님 눈을 가리려 하고, 저항하자 밥이나 먹자 합니다. 다행히 사장님 눈 가리는 일이 미수에 그쳤으나 이 일은 엄청난 나비효과를 불러와 감사에 이른 것입니다.


성적수치심이 성에 관련된 수치심이라면 직업의 특성에서 오는 수치심은 직업적 수치심이라 하는 게 맞을까요? 그렇다면 저는 매일 이 직업적 수치심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리스크를 관리하고 원칙을 세우고자 하시는 사장님과 그런 사장님의 눈을 가리려는 어떤 이들 사이에서 사장님의 신뢰와 존중을 이용해 입 좀 맞춰달라하는 청탁과 마주하는 것은 저에게 직업적 수치입니다.


그냥 내려놓고 월급루팡이나 하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굳이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직은 그 정도로 궁하진 않아서 말입니다. 굶으면 생각이 달라질진 모르겠지만 신념과 윤리를 버려야 할 만큼 궁하지는 않습니다만. 저는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습니다.


오늘 2차 퇴사통보도 빠꾸 먹었습니다. 잠시 흔들렸지만. 다시 퇴사의지를 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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