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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D-63

결정적이진 않았지만 시작점이었던

by 푸른국화

회사에 여러 가지 이슈가 터질 때마다 법무팀 이름이 팔리는 일은 비일비재(非一非再)합니다.

공식적으로 협조를 구하는 절차를 거쳐 의견을 받고 그 의견을 인용하는 게 맞겠지만 일하다 보면 놓칠 수도 있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구두(口頭)보고나 협의 과정에서 적당히 이름 팔리는 거야, 다 같은 회사일 하면서 시비를 가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것 또한 법무팀의 숙명입니다. 어느 정도는 알고도 그냥 넘어갑니다. 어디선가 품 팔지 않고 이름만으로도 일을 하고 있으니 손해일 게 없다, 그리 생각하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적당함입니다.

공식 결재 문서에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법무팀 의견이라 작성하여 사장님 결재를 받는 것은 적당히 눈 감아 줄 일이 아닙니다. 책임소재를 떠나서 명백한 허위보고이고 기만행위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불쾌감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이 일은 기분 풀릴 때까지 뒷담화나 하고 치울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을 추궁하거나 문제 삼으려는 게 아니라 재.발.방.지.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한 마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팀장님, 저희가 공식적으로 의견을 드렸던 적이 있던가요?

얼굴 보면 화를 참기 어려울 것 같아 사내 메신저로 무미건조하게 물었습니다. 미안하다고 하면 다음부터는 절차 지켜주셨으면 좋겠다 정도로 아쉬움만 전달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사자인 H 팀장은.

- 예전에 말씀해 주셨던 거 한 줄 넣은 정도입니다.

일반적인 내용이라 사장님도 별말씀 안 하셨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예전에요? 제가요? 걱정요?

- 제가 그렇게 말씀드렸던가요? 그리고 제가 걱정할 일인가요?


솔직히 허위보고에 이름 판 것도 화가 나지만 법무팀 의견 뒤에 달린 얼토당토않은 문장은 내 자존심에 큰 스크레치였습니다. 내 이름 팔거면 글이라도 그럴듯하게 쓰던지. 저는 이름을 걸고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만.

거기다 본인이 면피하려 내 이름을 썼으면서 본인 기준으로 내게 책임질 일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도 꽤나 모욕적으로 들렸습니다.

- 혹시 기분 나빴으면 미안합니다.

이 말엔 아닙니다가 정답일테지요. 뭐 같은 회사 다니는 사람들끼리 이런 일로 미안하고 말고가 뭐라고. 하지만 전 아무도 기대하지 못한 오답으로 답했습니다.

- 혹시 모르시는 것 같아 말씀드리는데 굉장히 기분 나쁩니다.

그랬더니 미처 생각지 못했다, 앞으로 세심하게 챙기겠다고 합니다. 이게 감정을 섬세하게 챙기고 말고의 문제인가요?


더 화가 나는 건 직속상사들의 태도입니다.

H팀장은 우리 팀에 계속 협조를 구할 일들은 생기지만 이 일로 영 불편한지 그의 직속상사인 K 부장이 회의 좀 하자고 대신 찾아왔습니다. 저를 찾아온 게 아니라 저의 직속상사인 J 부장을 찾아와서 회의를 요청했습니다. 한참 회의를 하다 J 부장은 저를 불렀습니다. K 부장은 현안에 대해 한참 넋두리를 쏟아 내었습니다. 한참 넋두리 후에는 이 사안을 사장님께 보고 드려야 하니 협조 좀 해달라고 합니다. 말 좀 맞춰달라 합니다. 알겠다고 했습니다. 알겠다고 했는데 저의 상사인 J 부장이 뜬금없이 말문을 열었습니다.

- 그건 그렇고. 지난 번에 그 건은. 거 법무팀 의견이라고 쓰면 어떡하나....전문가 의견 정도로 넘어가지...

전문가 의견이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습니다.

우와, 사태의 본질을 전혀 모르는 것에 충격이었고, 우리 편이 아니구나 싶어 섭섭했습니다.

아, 우리 팀 총알받이는 나구나. 최전방에 있는 사람은 나구나. 내 앞에 아무도 없구나.

그런데 J 부장의 말을 들은 K 부장의 답변은 더 가관이었습니다.

- 몰라, 나는. H가 그런 거야. 나는 골치 아파서 보지도 않았어.

잘 못한 사람은 H팀장이었지만 H팀장도 그 앞에 아무도 없이 최전방에 있긴 나와 같은 처지라 밉기보단 측은해 졌습니다.


H 팀장은 그 후로도 업무협조가 필요하면 부장이나 팀원을 대신 보냅니다.

회사는 이런 곳입니다. 우리 회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조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회사에 이런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 자체에 실망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K 부장과 J 부장은 우리 회사에서 꽤나 평판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모르겠습니다. 그 평판 좋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겐 좋은 사람인데 나한테만 다르게 대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도 좋은 사람들이라 사람을 좋게 보는데 제가 성질이 괴팍해서 그 좋은 사람들이 싫은 것인지.


그 후로 그 팀에선 여러 현안들이 끊이지 않았고, 그러다보니 제가 말캉말캉하게 굴지 않는 게 꽤나 불편했던 모양입니다. K 부장과 J 부장은 식사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업무적으로 풀지 않고 이런 식으로 넘어가는 게 몹시 마음에 들지 않고, 그저 삐친 아이 달래려 드는 것 같은 해결방식이 불쾌했습니다. 저는 월급을 받고 제 일을 할 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사건이 생길 때마다 업무를 대하는 자세는 늘 이런 식입니다. 이렇게 살아온 걸 비난할 생각은 없지만 저까지 이렇게 살자고는 하지 말아 주시길.

하지만 J 부장은 끊임없이 나에게 이런 방식을 가르칩니다.

오해는 하지 말고 잘 지내보자고 합니다. 큰 오빠 뻘이니 오빠처럼 생각하고(저보다 13살 많으십니다만...그 보다 오빠요?). 좀 친해 보자고 하는데,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월급을 받고 제 일을 합니다. 그뿐입니다.


이 좋은 회사에서 저만 이방인인데, 이방인은 교리를 배우라네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종교에는 신앙심이 생기지 않아서. 이교도의 삶을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교도는 다른 교리를 전파할 생각이 없습니다만. 교리전파의 목적도 없이 이교도의 삶을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믿어주지도 않고요. 개종하지 않은 이교도는 젊은 이를 현혹하거나 다른 이들의 믿음을 흔들어 놓을 거라 다들 위험요소로 볼테지요. 그러니 개종한 척이라도 하며 더불어 살거나 내 종교를 지키며 떠나거나.

결정적 계기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것이 시작이었습니다. 다른 교리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교도가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 아니면 떠나야 할지. 결정적 계기는 따로 있었지만 분명 고민의 시작은 이 지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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