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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렘 반 걱정 반, 시원 반 섭섭 반

퇴사 D-4

by 푸른국화

드디어 마지막 근무주입니다. 정말로 이런 날이 올 줄이야. 퇴사 결심을 했을 때 한참 남은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이런 날이 왔습니다.

"변화"를 "설렘"의 동의어로 인식하는 편이나 그럼에도 퇴사일이 다가오니 걱정이 앞섭니다.

엄청 시원할 줄 알았는데 아쉬움이 커집니다.


"지금 안에서 걱정하고 아쉬운 건 아무것도 아니야. 나왔을 때 걱정은 지금에 비할 바가 아니고, 나오면 아쉬움이 훨씬 크지."

올해 여름에 퇴사하고 개업하신 변호사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늦춘다고 답 있나.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해야지."

이 말씀에 십분 동의합니다.


하지만 다년간 조직 안에서 회사일을 하던 DNA가 순식간에 내일을 하는 사업자 DNA로 바뀌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운때가 맞게도 때마침 사건이 들어왔는데, 저는 덥썩 물지를 못하였습니다.


잘 아는 지인 A가 부동산 권리관계에 다툼이 생겨 소송을 염두에 두고 있다며 연락이 왔습니다. 제가 개업 소식을 전하기 전에 이미 다른 변호사들과 상담을 진행하였는데, 여러 변호사들이 소송으로 다투어보자는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그 중에 가장 승소를 자신하는 변호사를 수임해서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며칠 후 그 변호사가 착수금을 돌려줄테니 해임해 달라고 했다 합니다. 몹시 곤란하던 차에 제가 곧 개업한다는 소식을 듣고 연락을 취했다고 합니다.


"들어봐야 알겠지만 난 기본적인 스탠스가 되도록이면 소송은 피하자는 거야. 특히 소가가 작은 사건이면, 나는 소송이 진행동안 네가 들이는 노력과 스트레스가 절대 그 소가보다 작다고 생각하진 않아. "

"물론 그렇지만, 절대 줄 필요없는 돈이라는데 싸워보지도 않고 주면 바보되는 거잖아. 한 두명이 아니라 상담한 변호사 전부 내가 이길 사건이라던데. 그럼 해봐야지. 내가 이길 사건 미리 포기하면 억울하잖아."

"그래, 그럼 내가 해 줄만 하면 해주고, 그게 아니더라도 한 번 알아볼게. 하루만 시간을 줘."


저에겐 너무도 소중한 첫 사건입니다. 수임계약에 도장을 찍으면 일단 첫 달 손익계산이 마이너스를 피하는데다, 사건을 들고 첫 출근을 하는 유능한 개업변이 될 수 있습니다. 퇴사 직전 수임하고 개업해서 진행할 수 있는 이런 절묘한 타이밍에 보석같은 첫 사건이 들어오다니, 모든 것이 잘 되려는 징조인가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관련 자료들을 토대로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관련 법리를 찾아보니 이 사건은 제 지인에게 매우 불리한 사건이었습니다. 비용과 승소 가능성을 따져보면 소송을 진행할 실익이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벌써 몇 명에게나 낙관적인 상담을 받고 온 지인에게 부정적인 의견을 주려니 몹시 부담스러웠습니다. 거기다 여러 변호사가 승소의견을 냈다고 하니 제 의견에 확신이 들지도 않았습니다.

확신이 들지 않을 때에는 내 의견이 틀렸다는 근거가 없다는데 확신이 들 때까지 판례를 찾고 또 찾습니다. 법리는 A 상대방이 A에게 청구하는 금액을 지급하는 게 맞고, 이를 달리 판단할 만한 사례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A에게 소송을 안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내 의견은 소송하지 않고 적정한 수준에서 합의보는 게 맞는 것 같아. 사건 진행하면 패소할 가능성이 커. 그러니까 경제적 실익이 전혀 없어. 그런데 꼭 경제적 실익만이 전부는 아니니까, 네가 한 번 다퉈보고 싶고 판단을 받아보고 싶다면, 그리고 내가 도와주길 바란다면 내가 해 줄게. 그런데 의뢰인 입장에서 패소를 예상하는 변호사보다 승소를 확신하는 변호사가 더 좋을 수도 있으니까, 그건 한 번 생각해 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해주길 바라면 당연히 난 최선을 다할거야. "

"네 의견은 그렇다는거지?"

"응, 내 의견은 그래. 승소 가능성에 따라 소송할건지 말건지를 결정하려면, 나는 하지말라고 하고 싶어. 하지만 패소하더라도 해 보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 수는 있어. 패소할 사건이니까 안 맞겠다는 게 아니야. 난 뭘 가릴 차지가 아니거든. 다만, 의뢰인 입장에서 승소를 자신하는 변호사에게 사건을 맡기는 게 심리적 안정면에서 나을 것 같아서. "


개업 초기 믿을 구석은 지인뿐인데 막상 지인에게 돈을 받고 일을 해준다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닙니다. 다들 하는 말이니 이길거라며 부추겼다가 결과가 나쁘면 판사가 이해를 못하네란 말로 둘러대기에는 제가 너무 고지식합니다. 역시나 배고픔은 뒷전이고 쪽팔리기가 싫습니다.

"근데 나 이래서 사건 수임할 수 있을까?"

"그래서 되겠어? 거짓말 좀 잘 해봐, 그럴듯하게. 패소할거라는데 누가 사건을 맡겨?"

"그렇다고 내가 널 등쳐 먹으랴?"

"그런데 네 말이 맞을 것 같아. 그래서 전에 그 변호사도 착수금 돌려주며 안 맡는다고 한 것 같아."


결국 그는 소송을 포기하고 상대방과 적정 수준에서 합의를 봤다고 합니다. 주지 않아도 될 돈을 그냥 주긴 분해서 다투려 했는데 어차피 줘야 할 돈이라 하니 줘서 빨리 끝난 것만도 다행이라 합니다. 전문가의 말 한마디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전문가의 말 한마디에 양 당사자는 팽팽하게 맞서기도 하고 소송의지가 꺾이기도 합니다. 전자가 악이고 후자가 선이라는 게 아닙니다. 누군가의 삶에 어쩌면 매우 중요할지 모르는 일의 방향을 말 한마디로 정해 버릴 수 있음이 무겁게 느껴집니다. 그 무게를 쉽게 생각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심각해서야 수임을 할 수 있을까요?


그리 길지 않은 근속기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몹시 아쉽습니다. 그리고 엄청 두렵습니다. 시원하고 설레게만 할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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