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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국화 Jun 02. 2020

저녁 7시, 나를 위해 요리하는 시간#21

시간이 만들어내는 맛

처음 재판 변론을 하고 느낀점은 절대절대 상대방의 페이스에 말려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첫 변론이라 소송기록도 꼼꼼히 보고 변론준비도 열심히 했다. 변론요지는 물론 서면에서 주장하지 않은 상대방의 반론까지 예상하고 준비했었다. 그렇게 준비했어도 첫 변론은 긴장되고 불안하고 걱정되었다.

그렇게 준비도 긴장도 넘치게 장착하고 출석한 재판기일.

나는 피고측이었기에 상대방인 원고측이 먼저 변론했다.

머리가 히끗히끗하신 원고측 변호사는 순식간에 피고를 몹쓸 놈으로 만들어 버렸다. 원고측이 변론하는 요지를 메모하며 반박할 내용까지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반박 내용을 메모하고 있으면 원고는 벌써 다른 주장을 하니 손은 벌써 손 들었고 이제 귀, 머리도 따라가기가 버겁다.

- 피고측 변론하세요.

그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변론 전까지 열심히 준비한 것들은 아무 소용 없었다.

원고가 방금 변론한 내용에 대해 반박하다가 아 맞다 이 말도 해야하는데, 아 저게 중요한 사실인데하며 뒤죽박죽.

결국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은 하나도 못했다.


첫 재판을 말아먹고 이불킥하며 찬찬히 돌아보니 원고의 말 한마디한마디 대꾸할 필요는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내가 준비해간 내용을 차분히 변론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는데. 상대방 말꼬투리 잡다가 질질 끌려다녔구나, 말렸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다음부터는 내 페이스 놓치지 말아야지 다짐을 했다.


그토록 다짐을 했것만. 오늘 오전 재판에서 그때 그 실수를 반복했다. 어제 실컷 준비한 것이 무색하게 버벅이다 재판이 끝나고 말았다.


왜 처음도 아닌데 그런 실수를 했을까?

운전자들이 교통사고를 가장 많이 일으키는 때는 면허 딴 직후 초보 시절이 아니라, 초보딱지 떼고 한창 운전에 자신감이 붙을 때라고 한다. 미숙함이 사라지고 어느정도 자신감이 생기면 찾아오는 손님, 바로 방심 때문에.

오늘 나도 그랬다. 실컷 준비했다고 하지만 사실 요즘은 생초보 시절만큼 꼼꼼히 성실하게 준비하지 않는다.

그 이유를 능숙이라 믿고 싶었지만 사실은 방심이었다.

나는 요즘 방심하고 있었고 방심한 결과는 고스란히 법정에서 나타났다. 생초보 시절보다 더 부끄러웠다.

미숙은 변명이 될 수 있지만 방심은 변명이 될 수 없다.

미숙은 아마추어의 영역이고 아마는 변명이 가능하지만 프로에겐 오직 결과만 있을뿐 변명이란 있을 수 없다.

오늘 또 이불킥하게 생겼다.


돌아보면 당연한 결과인데 미리 대비하지 못하고 사람이 하는 실수는 다 하고 사는 나란 사람이 참 웃긴다. 어쩜 인생이 만들어 놓은 함정이란 함정엔 다 빠지고 사는지. 그러면서도 혼자 똑똑하고 잘난 줄 알고 사는 게 너무 웃기잖아, 나님아.

이렇게 웃기고 모자란데 살아가는 시간이 쌓이면서 조금씩조금씩 다듬어 지는 모습이 또 신기하다. 육아 아니라 육자(自) 재미가 쏠쏠하다.


肉의 기본은 밥을 먹이는 일. 오늘도 나를 위해 밥을 짓는다.

오늘 수고 많았으니 푸짐하고 뜨끈하게 김치찜닭.


레시피는 세상 간단하다. 닭볶음용 닭 반마리에 김치 반포기의 반. 큼직하게 썬 무를 냄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닭, 닭 위에 김치 덮어 물 붓고 1시간 넘게 푹 끓여주면 끝.

감자를 넣어주면 닭볶음탕 느낌이 난다.

육수를 따로 준비하지 할 필요없이 닭고기 우러난 국물에 김치국물 더해져 시원하고 감칠맛이 난다. 조금더 맛있게 먹으려면 맛술 한 스푼과 식초 한 스푼.



속없이 밥이 잘 넘어간다. 이렇게 오늘 하루도 어물쩡 살아냈으니 장하다.


보완해서 한번 더. 능숙해져도 매번 정성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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