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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춘희 Jan 05. 2019

한국인은 밥심이라 했던가

오스트리아_빈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중딩군', 

초2 '푸린양'과 함께 떠난 글쓰는 엄마의 겨울 여행은 

오스트리아의 짧은 이야기와 이탈리아의 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비행기는 빈 슈베하트(Wien Schwechat) 국제공항에 부드럽게 착륙했다. 이른 새벽에 도착하는 상황을 고려해 세안용품을 바로 꺼내 씻을 수 있게 트렁크 위쪽에 넣어두었다. 양치질과 세수를 하고 나니 상쾌하다. 느긋하게 음료수를 마시고 있을 때 첫 차가 도착했다. 정확하다. 여행의 시작이 좋다. 이번 여행은 왠지 완벽할 것 같다.


푸릇하게 밝아오는 도시 속으로 버스가 열심히 달려간다. 시내 광장에 버스가 선다. 승객을 모두 광장에 부려놓고 버스는 홀가분하게 떠났다. 버스를 벗어난 승객들은 캐리어를 끌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순식간에 우리 세 식구만 남았다. 우리도 문제없다. 숙소로 가는 지도를 출력해왔으니까. 지도에 능숙한 중학생 군이 앞장선다. 

자신 있게 걷던 중딩군이 멈춘다. 뒤따르던 우리도 멈춘다. 

“엄마, 지도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더 이상 가는 방법을 모르겠어.”


그럴 리가. 구글 지도에 호스텔 이름을 정확하게 입력했는데, 행여 스펠링이 잘못되었을 까 봐 몇 번이나 확인을 했는데, 그럴 리가 없지. 아이에게 지도를 넘겨받아 꼼꼼히 살폈다. 아까 버스에서 내린 곳이 이쯤이었으니까 우리는 이 길을 따라 여기까지 왔군. 앗! 다음 부분이 출력되지 않았다. 뒤늦게 출력되어 우리 집 프린터에 고이 누워 있을 런지, 현재 페이지만 출력되어서 영영 빛을 보지 못한 건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우리 손엔, ‘현재 페이지’뿐이다. 아이들과 내가 가지고 있는 핸드폰 석 대는 로밍 서비스를 신청하지 않아 인터넷을 사용할 수도 없다. 이번만큼은 완벽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짜로.




출근하는 시민들에게 묻고 물어 호스텔에 도착했다. 집에서 북경까지 비행시간, 길고 긴 경유시간, 더 길고 긴 빈까지의 비행시간을 버텼다. 그것까지는 해냈는데 이른 새벽 생경한 도심을 헤매고 나니 무시무시한 피로가 몰려온다. 호스텔 체크인은 오후 2시가 되어야 가능한데 지금 시각 아침 8시 반이다. 몸을 누이려면 족히 5시간은 더 버텨야 한다. ‘어린이 찬스’라는 걸 써야겠다.

“저희가 한국에서 출발해 방금 도착했어요. 저희 아이가 코피를 흘리고 몸이 좋지 않아서요. 체크인을 더 빨리 할 수 있을까요?”

어느 문장에도 거짓은 없다(비행기에서 코피를 잔뜩 쏟은 다음이었다). 

“객실이 모두 찼어요. 체크아웃하고 방을 정리하는 시간인 11시가 지나 봐야 체크인 여부를 알 수 있어요.”

“가장 먼저 체크아웃하는 방을 부탁드릴게요. 11시에 오면 될까요?”

직원의 얼굴에 곤란한 표정이 스친다.

“확답을 드릴 순 없지만 그 시간에 대기해보세요. 딸아이 얼굴이 많이 피곤해 보이네요.”

푸린양이 눈을 끔벅거리며 제 오빠에게 기대어있다. 

좋은 타이밍이다.


직원에게 핸드폰 심카드를 살 수 있는 곳을 물었다. 멍하게 기다리고 있기엔 할 일이 너무 많다. 무거운 트렁크를 호스텔에 맡겨두고 심카드 매장을 찾아 나선다. 직원이 표시해 준 지도의 위치를 가늠하려는데 푸린양이 어디인지 알겠단다. 시내의 스타벅스 매장 옆에 있다고 했지,라고 중얼거리는 엄마의 말을 듣고 생각이 났단다. 아까 호스텔을 찾아오면서 스타벅스를 봤다고. 그 옆에 심카드 매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초록색 여자 그림을 봤단다. 진짜 본 걸까?

호스텔에서 시내까지, 30분 전 트렁크를 끌고 헤맸던 그 길을 되돌아갔다. 이정표 삼아 걷던 다리를 건너자 상가가 즐비한 시내가 나타났다. 푸린양의 눈빛을 살핀다. 아이는 두리번거리더니 오른쪽 골목 언저리에 눈을 고정한다.




초록색 로고가 있다. 동그란 테이블에 커피를 두고 신문을 뒤적이며 모닝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 옆으로 심카드 매장이 있다. 푸린양의 얼굴에 뿌듯함이 흘러넘친다. 인터넷, 통화, 문자메시지 모두를 사용할 수 있는 심카드를 사서 핸드폰에 끼워 넣었다. 독일어 메시지가 주르륵 도착하더니 드디어 인터넷이 연결되었다. 구글 지도가 보여주는, 호스텔 가는 길이 아주 선명하다. 이제야 살 것 같다.    


호스텔 프런트가 북적북적하다. 체크아웃하려는 여행자들이 커다란 배낭과 묵직한 캐리어를 옆에 끼고 좁은 호스텔 로비를 채웠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직원이 우리를 부른다. 11시가 되려면 아직 30분이나 남았다. 3인실을 예약한 우리에게 적당한 방이 마침 생겼단다. 청소를 해야 하니 들어가려면 1시간은 더 기다려야 하는 데, 체크인하겠느냐 묻는다.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중딩군이 호스텔 주방에 물을 마시러 들어갔다가 깔끔한 조식 뷔페를 발견했다. 생각해보니 어제저녁, 식은 도시락 같은 기내식을 먹은 이후로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배가 고플 만도 하건만, 당장 호스텔을 찾아야 하고 당장 심카드를 사서 핸드폰을 사용해야 하고 당장 체크인을 해야 하니 허기마저 느끼지 못했다. 뷔페식당에 들어서니 맹렬히 배가 고파온다. 뷔페는 단출하다. 빵과 시리얼, 과일과 음료, 햄 몇 가지뿐이다. 조식 시간이 끝나가는 마당이라 쟁반은 더욱 휑하다. 서둘러 접시를 채우고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따끈하게 데운 빵에 기름진 버터를 넉넉히 바르고, 담백한 요거트에 시리얼을 부어 휘휘 젓고, 식빵 가운데 햄 두 장을 끼워 넣고, 각자의 입맛대로 식사를 시작한다. 중딩군은 콜라, 푸린양은 사과주스, 나는 커피를 앞에 두고서 비로소 긴장을 내려놓았다. 비행기를 벗어난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내내 진지했다. 배가 고픈지, 짐이 무거운지, 잠이 부족해 피곤한지 챙길 겨를이 없었다. 접시가 비워지고 배가 차면서 마음이 가벼워졌다. 우리가 오스트리아에 정말로 왔구나, 비로소 실감 났다. 




한국인은 밥심이라 했던가. 밥심이란 쌀알이 주는 힘이라는 걸 안다. 따뜻하고 보드랍고 적당히 말캉한 그 작은 알갱이가, 입 안에서 달짝지근하게 퍼지며 전해주는 그 든든함이 우리를 기운 나게 한다는 걸 안다. 기운 나게 하는 그 심은, 힘(力)이면서 또한 마음(心)이라는 것을 안다. 우리는 오늘, 한국에서 12시간쯤 떨어진 오스트리아 빈의 작은 호스텔에서 식빵을 오물거리며 기력을 회복하고 있다. 소복하게 담긴 하얀 쌀밥은 아니지만, 따뜻한 토스트를 앞에 두고 우리는 위로받았고 응원받았다. 이건 빵심이라고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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