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_빈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중딩군',
초2 '푸린양'과 함께 떠난 글 쓰는 엄마의 겨울 여행은
오스트리아의 짧은 이야기와 이탈리아의 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날씨가 끄물끄물한 것이 딱 겨울 유럽이다. 숙소에 머물자니 세상이 궁금하고 세상을 탐험하자니 몸이 축날 것 같다. 우리에겐 비방(祕方)이 있다. 흐린 날, 비 오는 날, 추운 날에 등장하는 방책이다. 도서관 혹은 영화관.
오늘은 영화관이 좋겠다. 오스트리아에서 외국어 영화는 세 가지 버전으로 상영된다. 독일어 더빙, 독일어 자막(OmU:Original mit Untertitle), 자막 없는 원어(OV:Original Version). 어린이 영화뿐만 아니라 성인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그럴 줄 알고 영어 전문 상영관의 주소를 확보해두었다. 영어 전문 상영관은 영어로 제작된 영화만을 상영하는 곳이다. 독일어 더빙도, 독일어 자막도 없다. 물론 영문 자막도 없다. 한국에서라면 한국어 자막 없이 영어로 영화를 본다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이지만, 독일어 천지인 이 곳에선 영어가 얼마나 친절한 언어인지 모른다. 적어도 독일어처럼 순수한 까막눈은 아니니까.
우리는 애니메이션 ‘패딩턴’을 볼 참이다. 애니메이션은 우리 셋 모두를 위한 선택이다. 간결한 영어 대사와 재미있는 이야기, 무엇보다 예쁜 화면이 있으니 몰라도 즐길 수 있으니까. 영화표 석장을 사고 콜라와 나초와 팝콘까지 챙겨 입장했다. 극장 안엔 고작 열댓 명. 쾌적하고 호젓하다.
페루의 깊은 숲 속에 살던 아기 곰이 영국 런던 패딩턴 역에서 새 가족을 만났다. 새 가족과 함께 살게 된 아기 곰은 날마다 말썽을 피우고 번번이 사건을 일으켰다. 푸린양은, 패딩턴이 욕조를 타고 계단 난간을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장면에서 깔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중딩군도 내내 킥킥거렸고 짬짬이 '저기는 런던 어디 아니야?' 하고 물었다. 애니메이션 패딩턴은 사고뭉치 아기 곰이 가족의 귀염둥이가 되는 어여쁜 영화였다.
생활 영어 수준이라 해독도 할 만했고 모험과 사랑이 넘치는 스토리도 좋았는데 영화 내내 등장하는 런던의 모습이 제일 예뻤다. 나무늘보처럼 느린 역무원 할아버지에게 표를 사다 기차를 놓칠 뻔 한 패딩턴 역, 사람에 치여 밀려다니다 바라본 웅장한 빅벤이며 입구의 공룡 뼈에 압도되었던 자연사 박물관까지, 영화의 모든 장면이 지난 영국 여행을 떠올리게 했다.
영화가 끝나고 화장실에 간 중딩군을 기다리며 앉아있는 우리에게 오스트리아 아줌마가 말을 걸어온다.
“영화 재밌죠? 영화를 보니 런던에 가고 싶어 지네요.”
“저도요. 실제 런던이랑 영화 속 런던이랑 똑같네요.”
아줌마는 더 가까이 다가왔다.
“어머, 런던에 가봤어요? 빅벤이랑 타워 브리지가 영화랑 똑같아요? 부럽네요. 지금 여행 중인가요? 일본인이에요?”
한국인이라는 대답에, 아줌마는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일본에만 가보았다고 얘기한다.
오스트리아에 살면서 영국 여행을 못 해본 아줌마와 한국에 살면서 일본 여행을 못해본 아줌마는, 서로의 여행을 부러워하다 헤어졌다.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이렇게 가까운데 가지 그래요?라고.
결국 여행이란 거리의 문제가 아니다. 열망의 문제이다.
기꺼이 열몇 시간을 날아, 수일의 시간과 많은 돈을 들여도 좋다는 간절한 열망.
그 열망이 지극할수록 더 용기를 내게 된다.
영화를 보는 사이, 해가 졌다. 거리의 조명이 화려하다. 영화 감상 다음엔 식사. 우리의 나들이 코스도 연인의 데이트 코스와 다르지 않다. 블로그에서 유명한 비엔나 립스를 먹으러 가자.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나 욕망이 없는 우리는 맛집에 대한 열망도 없는 편이다. 블로그의 후한 후기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어찌 된 노릇인지 그들과 나는 ‘맛있는 맛’의 기준이 번번이 달랐다.
레스토랑은 저녁 시간이라 사람들로 가득하다.
“예약하셨나요?”
“아니요.”
“기다려야 해요. 시간이 꽤 걸리겠는 걸요.”
시간이 걸리겠다는 말을 듣는 순간, 맹렬하게 배가 고파온다.
“몇 시쯤 식사할 수 있을까요?”
“예약 시간을 미룬 테이블이 있는데 괜찮다면 한 시간 안에 식사를 마칠 수 있나요?”
빨리 먹기라면 문제없다!
레스토랑 내부의 천장이 높고 둥그렇다. 동굴 속 같기도 하고 와인 창고 같기도 하다. 자리를 잡자마자 고민 없이 비엔나 립스와 샐러드를 주문했다. 호주 시드니에서도 립스가 유명하다는 레스토랑에 간 적이 있다. 그곳에선 립스보다 옆 테이블의 커플이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헤어지는 중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자가 차이는 중이었다. 남자는 그럴 줄도 모르고 양복을 갖춰 입고 꽃다발을 준비해왔다. 청혼을 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을 속삭이는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여자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남자는 소리치거나 잡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 후 그도 자리를 떠났다. 꽃다발을 들고 터덜터덜. 그들이 떠난 테이블 위에는 커다란 접시만 남았다. 아! 그들은 립스를 한 점도 먹지 않았다. 몹시 안타까웠다.
오늘 우리의 왼쪽 테이블에선 한국인 아가씨 여행자 둘이서 뼈에 붙은 살점을 묵묵히 뜯고 있다. 오른쪽 테이블에선 서양인 아줌마와 아이들 한 무리가 요란스럽게 스테이크를 자르고 있다. 어느 쪽도 안타까울 일은 없겠다. 드디어 우리의 립스가 도착했다. 푸짐함으로 승부하는 요리답게 도마만한 나무 접시를 가득 채우고 있다. 기대감 없이 시작한 저녁 식사 치고 우리는 열렬했다. 손에 묻은 소스를 쪽쪽 빨아먹고, 부스러기 한 조각 없이 감자튀김을 해치웠다. 2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립스는 언제나 보통은 한다. 맛이 아주 없지도, 아주 있지도 않다.
밤이 깊어졌다. 조명을 받은 슈테판 성당이 새하얀 자태를 드러냈다. ‘빈의 혼’이라 불리는 슈테판 성당은 모차르트의 결혼식과 장례식이 열린 곳으로 많은 여행자들이 찾는다. 겨울바람은 여전한데 성당 앞은 여행자들로 북적인다. 137미터짜리 첨탑을 바라보는 얼굴 위로 겨울바람이 스쳐 지난다. 배부른 저녁, 겨울바람이 차가운 줄도 모르겠다. 깔깔거리며 감상했던 패딩턴의 기억이 어느새 아스라하고 립스 소스의 달콤함만 생생하다. 춥고 흐린 날, 여행의 완성은 결국 외식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