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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춘희 Feb 02. 2019

20센트만 돌려주면 된다니까_베네치아의 배반

이탈리아_ 베네치아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중딩군', 

초2 '푸린양'과 함께 떠난 글 쓰는 엄마의 겨울 여행은 

오스트리아의 짧은 이야기와 이탈리아의 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우와. 멋지다.” 

기차역 밖에는 소문난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반응이 예사롭다는 듯 푸른 수로는 여유롭게 넘실거린다. 물의 도시라는 타이틀이 제 옷처럼 어울리는 곳, 베네치아에 도착했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멋진 건축물 아래에서 푸른 바닷물이 유유히 찰랑거린다. 기차 객실에 딸린 작은 세면대에서 고양이 세수를 하고 온 우리는 몰골 따위 개의치 않고 사진을 찍어댔다. 이런 풍경이라니, 도시가 이런 풍경을 가지고 있다니. 사진 찍는 걸 즐기지 않은 나조차도 앞장서 카메라 앞으로 달려간다.


오늘 아침, 우리는 베네치아에 유난히 후하다. 막 도착한 여행자에게 무심히 던져준 아름다운 풍경 덕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숙소를 찾아가야 한다는 부담을 던 탓이다. 첫 여행지인 오스트리아에서 머무는 8일 동안 우리는 호텔과 호스텔에 머물렀다. 맛있는 조식을 먹고 근사한 객실에 머물며 친절한 여행자들을 만났다. 그렇다, 우리는 그 여드레 동안 김치찌개를 먹지 못했다. 호스텔 공동주방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는 있었지만 쉰 김치 냄새가 진동하는 김치찌개를 해 먹을 수는 없었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  ‘한식 결핍’이 예상되는 기간에 취사가 가능한 비앤비로 예약해 두었는데 지금이 딱 좋은 타이밍이다. 밤 기차를 타고 오느라 노곤한 피로감을 얼큰한 우리 음식으로 풀어내야겠다. 이것만으로도 숙소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는 데, 지금 역 앞으로 숙소 주인장이 달려오고 있다. 우리를 마중하러. 지도를 펼치지 않아도 핸드폰 화면에 코를 박지 않아도 좋은 이 도시가 사랑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숙소 주인장 라일라를 따라 들어간 우리 숙소는 정돈되어 있다. 대리석 바닥은 반질반질 윤이 나고 침구는 호텔의 것처럼 구김이 없다. 더블침대가 있는 침실과 소파베드가 놓인 거실, 넓고 깨끗한 욕실이 마음에 쏙 들었다. 냉장고와 세탁기와 작은 식탁이 함께 자리 잡은 주방도 흡족했다. 


주방을 둘러보다 눈이 멈춘 그곳에 가로로 긴 창이 있었다. 푸른 수로가 내다보였다. 창 너머로 푸른 물이 일렁이고 등교하는 학생을 태운 보트가 물살을 가르며 지나고 있었다. 이 베네치아스러운 주방이라니. 에펠탑이 보이는 숙소가 파리 여행자의 로망이라면, 수로가 내다보이는 숙소야말로 베네치아 여행자의 로망이 아니겠는가. 


나흘짜리 우리 집에 짐을 풀었다. 세면용품을 욕실로 옮기고 옷가지를 정리했다. 트렁크에 담아온 한국 식량으로 냉장고를 채웠다. 오스트리아 호텔에서 제공된 우리 몫의 실내화를 버리지 않고 챙겨 왔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인 숙소에서 신고 다니기에 딱 좋겠다. 여기저기 우리 물건으로 채워진 숙소가 더욱 포근해졌다. 끓인 누룽지와 오징어채 볶음을 꺼내 아침을 먹었다. 


밥을 먹고 난 우리는 지도를 챙겼다. 라일라에게 물어둔 심카드 판매점을 찾아가 보자. 언제부터인가 인터넷 없는 여행은, 정확하게 따지자면 구글 없는 길 찾기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 되었다. 종이지도를 들고 행인에게 물어가며 여행을 하던 때가 백만 년도 더 지난 것처럼 아득하다. 라일라가 가르쳐준 심카드 판매점에 도착해서 이탈리아용 심카드를 새로 끼워 넣었다. 이제야 베네치아 여행을 시작할 수 있겠다. 제대로.






 

해 질 녘에야 숙소로 돌아왔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우리는 장을 보러 나섰다. 슈퍼마켓은 가까웠다. 처음 보는 식재료와 흥미로운 간식거리는 언제나 걸음을 멈추게 한다. 구석구석 이탈리아 슈퍼를 구경한 우리는, 결국 아는 것들로 장바구니를 채웠다. 생수, 우유, 주스, 당근, 양파, 감자, 방울토마토 그리고 문제의 닭고기. 오늘 밤 메뉴는 닭볶음탕이다. 묵직한 장바구니를 들고 어두워진 수로를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장 봐온 식재료를 정리를 하다 말고, 아이들을 불렀다. 


“이것 좀 볼래? 이거 닭고기 맞아?”

아이들이 고개를 디밀고 닭고기 팩을 들여다본다. 

“팩 하나는 닭고기 맞는데, 하나는 아닌 것 같아.”

“엄마, 이거는 칠면조야.”

생긴 모양새가 똑같아서 바구니에 담았는데 그중 하나는 칠면조였다. 

가격은 비슷한데 덩어리가 더 커서 담았더니. 에잇!   

“닭고기로 바꿔올게.”

외투를 걸치고 마트로 달려갔다. 







8시인데 가게는 벌써 폐점 준비를 하고 있다. 하나뿐인 계산대의 줄이 길다. 계산대의 직원 말고는 눈에 띄는 직원이 없다. 긴 줄 끝에 선다. 주머니에 넣어둔 영수증을 꺼내 들었다. 한 손엔 칠면조 팩, 다른 한 손엔 영수증, 준비가 끝났다. 5분을 기다려 계산대의 직원 앞에 섰다.

“아까 산 칠면조인데요. 닭고기로 바꾸고 싶어서요. 어떻게 하면 되죠?”

“닭고기를 가져오세요.”


이번엔 신중하게 닭고기를 고른다. 팩을 골라 들고 계산대 앞으로 갔다. 다른 손님의 장바구니를 계산하느라 직원이 분주하다. 계산대 앞에 서 있다가 직원이 고개를 들자 닭고기 팩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니까 나의 메시지는 이것이다.

‘조금 전 칠면조 고기를 닭고기로 교환하러 온 사람이에요. 닭고기 가져왔으니까 바로 계산해줄래요?’ 

우리는 이미 구면이며 나의 상황을 당신이 충분히 알고 있지 않으냐, 그러니 바로 처리를 바란다는 그윽한 눈빛을 보냈다. 직원도 눈으로 말했다.

‘줄을 서세요.’


이번엔 칠면조 팩과 닭고기 팩과 영수증 한 장을 들고 줄을 섰다. 다시 5분이 지나고 계산대 앞에 섰을 때 직원이 바뀌어 있었다. 흡, 숨 고르기를 하고 자초지종을 다시 설명했다. 아까 산 칠면조 고기와 방금 산 닭고기의 가격 차이는 20센트였다. 바코드 리더기로 칠면조 쓱, 닭고기 쓱, 영수증 쓱, 세 번이면 정리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다. 계산대 앞에 새로 선 직원이 나를 뒤로 물러서게 하더니 매니저를 부른다. 직원은 다음 손님의 장바구니에 집중한다. 






unsplash.com/@heftiba


줄 뒤편에서 멍하게 5분을 보내자 남자 매니저가 나타났다. 폐점을 앞둔 그는 몹시 바빠 보인다. 흡, 한 번 더 숨 고르기를 하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세 번째다! 나는 이런 의중을 전했다. 당신에겐 입고와 출고를 맞춰야 하는 절차가 필요하고, 정확한 정산을 위해 영수증이 제대로 처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신이 폐점 준비를 하느라 정신없어 보이고 20센트로 인해 번거로운 상황을 맞이하는 걸 나는 원치 않는다, 20센트를 기부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니 이대로 집에 가면 안 되겠느냐고, 나는 집에 가고 싶다고 얘기했다(이런 뉘앙스를 담았다). 


매니저는 심각한 얼굴로 나의 얼굴과 나의 손에 들린 물건과 영수증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입을 열었다.

“20센트가 남네요. 다른 물건을 가져오면 20센트를 빼고 계산할게요.”

“지금은 돈을 가져오지 않아서 다른 물건을 살 수가 없어요. 잔돈은 됐어요. 그냥 가도 될까요?”

그는 그럴 수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절대로 그렇게 할 수는 없단다. 그렇다면 좀 더 기다리더라도 20센트를 받아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매니저는 손님들의 계산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를 데리고 계산대로 갔다. 그리고는 계산대의 금고를 여는 대신 허리를 숙여 비닐봉지를 세기 시작했다. 포장용으로 사용하는 슈퍼마켓용 비닐봉지 스무 장을 움켜쥐더니 나에게 건넸다. 

“잔돈 대신 이걸로 받아야 하나요?”

“예스. 마이 룰!”


 룰이라는 단호한 단어 앞에서 나는 입을 닫았다. 몹시 당혹스러웠고 매우 불쾌했다. 이것이 여기의 진짜 규칙인지 알 길이 없으니 군소리 없이 비닐봉지 무더기를 들고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잔돈은 환불하지 않고 비닐봉지로 주는 것이, 이 슈퍼마켓의 규칙일 수도 있을 거야, 마음을 토닥이며 돌아섰다. 하지만 이내 그것이 규칙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불과 30분 전에 이 비닐봉지를 공짜로 사용했으니까.



 



숙소로 돌아온 나는 사건의 전말을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욕을 퍼부었다. 부글부글 치받히던 분노가 조금 가라앉았다. 속이 깊은 냄비에 닭볶음탕 재료를 넣고 불에 올렸다. 자글자글 끓어오르는 동안, 푸린양은 세탁기에 빨래를 집어넣었다. 중딩군은 소파베드를 펼쳐 거실을 아늑한 침실로 만들었다. 한쪽에선 닭볶음탕이, 다른 한쪽에선 보리차가 보글보글 끓고 있다. 



달짝지근하고 매콤한 닭볶음탕 한 냄비를 깨끗하게 먹어 치웠다. 밥 먹는 사이, 다 된 빨래를 꺼내 건조대에 빨래를 널었다. 설거지를 하는 사이, 아이들이 조잘거리다 잠들었다. 설거지를 끝내고 이번엔 모카포트를 꺼내 커피를 끓인다. 식탁 위에 며칠 동안의 영수증 무더기를 올려두었다. 정리를 시작해 볼까나.


모카포트의 커피가 슉슉 소리를 내며 끓어오르고 커피 향이 집안을 가득 채운다. 큼직한 컵에 커피를 따라 부어 들고 주방 창가에 선다. 인적이 드문 골목길, 가로등을 받아 반짝거리는 까만 물. 평화로운 밤이다. 

하지만 의자 위에 내팽개쳐진 비닐봉지 무더기를 발견하고 나의 평화는 단박에 깨졌다. 저게 20센트어치라고? 들끓는 미움을 뜨거운 커피로 꾸욱 눌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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