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_피렌체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중딩군',
초2 '푸린양'과 함께 떠난 글 쓰는 엄마의 겨울 여행은
오스트리아의 짧은 이야기와 이탈리아의 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소매치기에게 혼을 뺏기고 돌아온 저녁.
피렌체 시내에서 찐득한 라자냐와 짭짤한 까르보나라 파스타로 배를 채웠다. 부드러운 카푸치노로 기력도 충전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아이들은 젤라토를 할짝거렸다. 심신의 허기를 달래는 데는 음식만 한 것이 없다. 당장이라도 이탈리아를 떠나고 싶던 배신감은 싹 사라졌다. 고난를 이겨낸 여행자의 영웅심만 남았다.
배 부른 저녁, 우리는 각자 마음에 드는 곳에 드러누웠다. 중딩군은 주방 소파베드에, 나는 안방 침대에 자리를 잡았다. 침실과 주방을 기웃대던 푸린양은 소파 베드로 몸은 날린다. 오빠가 열심히 키우고 있는 게임 캐릭터가 궁금한 모양이다.
피렌체의 밤을 위해 나는 만반의 준비를 해왔다. 모든 여행에 언제나 책이 있었다면 이번 여행엔 영화도 챙겨 두었다.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라야 하듯, 피렌체에선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를 보아야 한다. 새로울 것도 없는 영화이지만 우피치 미술관에서 시작해 두오모 쿠폴라에서 절정을 맞이하는 이 영화를, 피렌체에서 감상하는 건 당연한 순서가 아니겠는가. 피렌체를 여행하는 열 가지 방법을 꼽는다면 아홉 번째쯤은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를 보며 피렌체의 밤 보내기’가 되어야 한다. 아이들은 종알거리며 게임 캐릭터 키우기에 여념이 없다. 노트북을 꺼내와 영화 감상 대열을 갖춘다. 달달한 믹스커피도 한잔 준비해야겠다. 카푸치노의 단맛 하고는 차원이 다른 일차원스러운 달달함이 있다.
딴따라단 딴따라라란.
스토리만큼이나 사랑받는 영화음악이 깔리며 영화가 시작된다.
“피렌체의 두오모는 연인들의 성지래.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곳. 언젠가 함께 올라가 주겠니?”
여주인공 아오이의 낮은 목소리로 영화가 시작된다. 젊은 두 연인의 사랑과 오해, 긴 기다림과 재회를 담은 영화. 2001년에 제작된 영화는 오래되고 낡았고 유행이 지나가 한마디로 ‘올드’하다. 남자 주인공 준세이의 통 넓은 청바지와 애매한 간격의 체크무늬 셔츠는 더욱 그렇다. 다행히도 피렌체라는 도시와는 잘 어울린다. 준세이의 스승인 조반나 교수는 이 도시를 이렇게 정의했다.
“이 곳은 중세시대부터 시간이 멈춰버린 거리야. 역사를 지키기 위해 미래를 희생한 거리”
멈춰버린 도시의 시간 덕분에 1990년대로 등장하는 영화 속 모습과 지금 도시의 풍경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 속 젊은 연인들의 나이가, 그 시절의 나와 비슷해 오히려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열정적인 사랑 따위, 살다 보면 부질없다고 콧방귀를 날리는 처지가 되었지만 지루하고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는 힘은 이제는 가물가물한 그 시절의 열정 덕분이 아닐까.
낯선 도시, 오래된 이탈리아 주택, 하얀 침대보가 깔린 호두색 침대, 덧창이 달린 기다란 창문. 다분히 이탈리아스러운 공간을 채운 일본 영화 한 편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아줌마의 낭만을 깨운다. 중세에 멈춘 도시, 골목마다 연인의 이야기가 새겨진 도시 피렌체가 몹시 궁금해진다.
밤이 깊었다. 밤이 깊을수록 고요해지는, 그래서 더 무서워지는 화장실에 후다닥 다녀왔다. 푸린양을 안아서 침대로 옮기고 중딩군이 잠든 주방 불을 끈다. 고요하다.
오늘 피렌체 여행은 베키오 다리에서 시작한다. 아르노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중 가장 오래된 베키오 다리는 도시의 모든 다리가 폭파된 2차 세계대전 중 한 독일군 사령관의 소신으로 유일하게 폭파를 면했다. 덕분에 로마시대의 마지막 다리로 남게 되었다(전쟁이 끝난 후 이탈리아 정부는 독일군 사령관에게 명예 피렌체 시민권을 헌정했다고 한다).
베키오 다리는 교각 위에 상가을 얹고 있다. 중세시대엔 푸줏간이나 가죽 처리장이 자리 잡고 있었고 지금은 번쩍거리는 금은방으로 가득하다. 금붙이들이 누런빛을 뽐내며 쇼윈도를 차지하고 있다. 남의 금송아지를 원없이 구경하고서 강변을 따라 걸으니 트리니타 다리가 등장했다. 단테가 연인 베아트리체를 재회했던 다리. 평생 단 두 번의 만남을 가졌을 뿐인데 단테의 영혼에 머문 베아트리체. 둘의 사랑은 귀족의 딸과 가난한 시인이라는 신분의 차이로 시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누군가의 영혼을 점령했던 강렬한 사랑은 여전히 뜨겁게 기억되고 있다.
피렌체는 화려한 르네상스의 도시이자 뜨거운 사랑의 도시라고 불러도 좋겠다. 도시의 광장은 천재들의 작품으로, 도시의 공기는 연인들의 사랑으로 채워져 있으니. 스크린 속 준세이와 아오이가, 역사 속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피렌체의 대표 선수이다.
우와!
탄성이 터졌다. 거대하고도 강렬한 건축물이 우리 앞에 등장했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백합과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이 성당은 단연코 피렌체의 상징이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가 브루넬레스키가 완성한 둥그런 지붕도 한눈에 들어온다. 지름이 40미터에 달하는, 기둥 하나 없는 이 지붕을 로마의 판테온을 보고 영감을 받아지었다는 설명보다 건축 문외한인 나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저 두오모에서 이루어진 연인의 재회이다. 털썩 주저앉아 기약 없는 약속에 기대어 있던 준세이 앞에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나타난 아오이. 그들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미래를 꿈꾸었겠지. 피렌체의 두오모는 연인들에겐 사랑의 성지이며 여행자에겐 도시 풍경을 감상하는 훌륭한 전망대이다.
전망대에 오르기로 했다. 소문대로 계단은 좁고 어둡다. 오르고 내리는 계단이 한 곳이라 누군가가 내려오면 오르던 우리는 몸을 비틀어 공간을 내주어야 한다. 처음 얼마 동안은 그것도 즐거웠다. 내려오는 이들과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나눴고 헐떡거리는 그들을 비웃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점점 말수가 줄어갔다. 말하는 것도 웃음을 터뜨리는 것도 굉장한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라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말수도 웃음도 잃은 우리는 표정도 잃어갔다. 계단을 100개쯤 올랐을 때 쉬어 갈 수 있는 공간이 나타났다. 벤치가 놓여있고 내려다보이는 도시 풍경도 아름다웠다. 아이들은 더 이상 오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투덜대는 두 아이를 달래서 올라오느라 피곤함이 두 배였는데 잘 되었다. 아이들은 이곳에 남아 쉬면서 엄마를 기다리겠단다.
아직 3분의 2 만큼의 계단이 더 남아있다. 혼자 오른다. 숨이 턱에 차면 성당 벽에 뚫린 네모난 구멍에 고개를 들이밀고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내려오는 이와 마주하면 멈춘 김에 잠시 쉬었다. 허벅지가 딱딱해질 즈음, 드디어 계단이 끝났다. 하늘은 파랗고 붉은 지붕을 인 피렌체 시내는 과연 아름답다. 창공 높은 곳에서 만나는 바람이 시원하다. 영화에선 두오모 꼭대기에 철조망이 둘러져 있지 않았는데 지금은 철조망이 빙 둘러있다. 세월이 흘렀으니 달라졌겠지. 빙 돌며 풍경 사진을 찍다가, 나는 눈을 의심했다. 눈 앞에 영화 속 두오모가 있다. 그 붉고 둥근 지붕이 2시 방향에 있다. 그럴 리가! 내가 지금 허벅지 근육이 찢어질 만큼 고생하며 400개가 넘는 계단을 올라왔는데! 내가 딛고 서있는 이것이 두오모여야 하는데, 눈 앞의 저것은 무엇이란 말이냐!
그렇다. 눈 앞의 저 둥근 것은 피렌체 두오모이며 내가 아등바등 올라온 이것은 종탑이었다. 브루넬레스키와 쌍벽을 이루었다는 건축가 조토의 종탑. 절망감과 낭패감이 밀려들었다. 올라가 전경을 감상하는 전망대는 도시에 하나면 충분하지 않겠느냐며, 입구에 ‘두오모 아님’을 눈에 띄게 표시해두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나는 두 배의 제곱만큼이나 무거워진 다리를 질질 끌며 계단을 내려왔다. 올라오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이곳이 두오모가 아님을!
바보 같은 짓을 한 이는 나 혼자였다. 종탑을 내려온 어떤 여행자에게서도 분노를 찾아볼 수 없었다. 단지 피로해 보일 뿐.
그 밤, 종아리와 허벅지에 파스를 덕지덕지 붙이고 나는 영화를 다시 보았다. 영화 속 피렌체가 더 이상 생경하지 않았다. 준세이가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아르노 강변과 좁은 골목이, 연인이 재회하는 시뇨리아 광장이 동네처럼 친근했다. 첫날 보았던 것과는 또 다른 감회에 젖었다. 하지만 나는 영화에서 결정적인 옥에 티를 찾아내고 말았다. 두오모에서 재회하는 연인, 또각또각 구두를 신고 464개의 계단을 오른 아오이가, 종탑보다도 50개나 더 많은 계단을 오른 그녀가 허벅지를 감싸 쥐지 않고 그렇게 반듯하게 서있다니! 누가 봐도 그건 옥에 티다.
겁 없는 소매치기 이야기, 밤이 깊을수록 무서워지는 화장실 이야기는
<글쓰는 엄마의 이탈리아 여행법>에 실려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