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춘희 Feb 23. 2019

우아한 엄마이고 싶었어

이탈리아_레체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중딩군', 

초2 '푸린양'과 함께 떠난 글 쓰는 엄마의 겨울 여행은 

오스트리아의 짧은 이야기와 이탈리아의 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호스트 주인장이 새벽부터 분주하게 주방을 오가더니 이국적인 아침상이 준비되어 있다. 쿠키가 들어있는 유리병과 새하얀 식기, 오렌지가 한가득 담긴 나무 볼, 마른 행주로 덮어둔 푸짐한 빵 쟁반. 손님 대접을 제대로 받는 것 같다.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커피를 내리고 유리 항아리에 담긴 주스를 덜어 아침 먹을 준비를 마친다. 감탄사가 터질 만큼 예쁘고 세련된 식탁이지만 먹을 건 별로 없다. 따끈하게 속을 데울 달걀 프라이도 없고, 빵 사이에 넣어 먹을 햄이나 치즈도 없다. 빵에 바를 버터와 쨈뿐이다. 


아침에는 항상 밥을 먹는 아이들이었지만 여행지에선 빵도 시리얼도 그럭저럭 불평 없이 먹어왔다. 그런데 오늘 아침엔 아이들 투덜거리는 소리가 크다. 우유가 너무 차다는 둥, 따뜻한 게 하나도 없다는 둥, 빵 속이 부드럽지 않다는 둥, 쿠키가 너무 딱딱하다는 둥. 전자레인지가 없으니 우유를 데울 수도 없고 다른 여행자와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하고 있으니 지글지글 프라이를 구울 수도 없다.


 빵 속이 부드럽지 않은 것, 쿠키가 딱딱한 것도 엄마인 내가 어찌할 방도가 없는 일인데 아이들은 아침 먹으라고 깨운 엄마 탓이라는 듯 불만을 터뜨렸다. 장시간 운전을 한 탓에 몸이 무겁고 입이 깔깔해 그렇지 않아도 입맛이 돌지 않은 데 아이들까지 뾰로통하니 아침 생각이 싹 사라진다.




“이 길로 가면 나올까?”

“나오겠지.”

“구글로 확인해봐. 성당 가는 길이 맞는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아이가 이내 고개를 든다.

“인터넷 연결이 안 돼.”

“이 길로 걸어가 보자. 사람들이 많이 가는 거 보니까 이쪽이 맞는 것 같아.”

“잘 알고 가야지. 잘못 가면 또 걸어야 하잖아.”

“나올 거야.”

이 도시의 길을 모르는 것도, 인터넷 연결이 안 되는 것도 엄마인 나의 탓이 아닌데, 레체에 가보자고 일정표에 끼워 넣은 엄마 탓인 양 아이들이 까칠하게 군다.



“투어 하는 자전거가 있네. 저거 탈까?”

“그럼 저 쪽 안내소에 가서 물어보고 올까? 아이들이 갈만한 데 있는지?”

“엄마 혼자 갔다 와. 난 다리 아파.”

자전거도 타지 않고 관광안내소에도 가지 않고 우리는 패스트푸드 점에 들어왔다. 


간식거리를 앞에 둔 우리 사이에 냉기가 흐른다. 아니, 이건 냉기가 아니다. 폭발 직전에 다다른 엄마의 숨 막히는 침묵이다.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여기는 남의 나라이니 집에서만큼 막무가내로 화를 내는 건 참아야겠지, 그것만은 잊지 말자.




"

이건 너희의 여행이기도 하지만 엄마의 여행이기도 해. 너희들한테 좋은 경험을 하게 해 주고 평생 남은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은 건 맞아. 그렇지만 엄마도 좋은 추억 만들고 싶어. 그래, 어쩌면 엄마가 더 오고 싶었고 더 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라. 

기대했던 것들을 직접 보면서 아, 어릴 적에 왔더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청춘일 때 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삶이 또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 다른 방향의 삶도 꿈꿔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막 들어. 

그래서 너희들이 지금, 더 많이 보고 생각하고 느끼고 가슴에 담아두었으면 좋겠어. 나중에 다시 올 수 있겠지, 몇 번이나 더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과 나중은 다르니까, 엄마와 동생과 오빠와 같이 가지는 이 시간에 집중했으면 좋겠다는 거야. 

인터넷이 안 되는 것도, 길을 찾지 못하는 것도, 숙소가 실망스러운 것도, 맛집이 영 별로인 것도 엄마 탓이 아니야. 그래도 엄마는 미안해. 기차를 놓치는 것처럼, 추운 거리에서 잠들게 하는 것처럼 힘든 일이 생길 때도 너무 미안해. 그럴 때 너희가 빙그레 웃으며 건네는 ‘엄마, 우린 괜찮아’ 한마디에 알 수 없는 힘이 생겨.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서 일을 해결하게 하는 에너지가 생기더라. 

힘내야지, 결심을 하게 하는 건 너희가 힘든 내색 없이 방긋 웃어줄 때였어. 씩씩해야지, 마음을 다잡게 하는 건 너희가 밝고 신나게 하루를 즐길 때였어. 세상에 우리뿐이라는 듯 둘이 웃고 깔깔거릴 때, 고개를 맞대고 지도를 보며 길을 찾을 때,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그림을 들여다볼 때 그리고 엄마 오늘 정말 재밌었어, 할 때였어.

이건 엄마의 여행이기도 해. 좋은 추억을 만들고 싶어. 엄마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추억은 너희의 모습이야. 여행에 즐기고 집중하는 그 모습이 벨라스케스의 그림보다 포지타노의 바다보다 더 예쁜 추억이고 소중한 재산이야. 여행이 즐겁기도 하지만 아닐 때도 있다는 거 알아. 친구들을 만나지도 못하고 같이 게임을 하지도 못해서 답답하다는 거 알아. 그래서 와이파이에 집착하는 것도 알아. 에이, 여행 오지 말걸,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는 거 알아. 

하지만 우리는 여행을 선택했고 지금 그 길 위에 있어. 길 위에 있다고 여행이 무작정 즐겁고 행복하지 않다는 거 알잖아. 여행도 노력이 필요해. 즐겁게 만들려는 노력, 추억을 만들려는 노력 말이야. 지금 우리는 그래. 엄마는 그 노력이 과분해서 지치고 너희는 그 노력이 부족해서 지루한 거야. 엄마한테서는 덜어내고 너희에게는 더하는 셈이 필요한 때인 것 같아. 여행은 우리가 같이 만들어가는 거니까. 

"






아이들 머리 위로 잔소리가 가득 찬 포대를 들이부었다(하지만 명연설이었다). 남의 나라 남의 영업장이니 막무가내로 화를 내는 것만 참았을 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지고 얼굴이 달아오르고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아이들은 내내 입을 다물고 가만히 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아이들에게 쏟아부은 건, 비단 오늘의 일 때문만은 아니다. 아이들은 자주 무관심했고 시큰둥했다. 깊은 감동을 바라지 않았고 대단한 열의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겨울바람만큼 쌩했다. 그때마다 이 여행을 돌이켜보았다. 여행지를 잘못 선택했나, 숙소가 별로인가, 너무 많이 걸었나? 반성도 나의 몫이고 결심도 나의 것이었다. 아이들이 더 즐거운 곳을 찾았어야 해, 라며 반성하고 내일은 조금만 걷고 맛있는 걸 먹자, 고 결심했다. 엄마의 애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은 한결같았다. 


결국 오늘 터지고 말았다. 묵혀두었던 말들을 남김없이 뱉어냈으니 속이 시원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못하다. 아이들인데, 편한 엄마한테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낸 건데, 좋은 건 좋았지만 별로인 건 별로니까 그렇게 표현한 건데, 이젠 그 표현마저 하지 않으려나? 그냥 담아둘 걸 그랬나. 여행을 이제 망친 건가. 텅 비어버린 포대에 그 많은 말들을 다시 주워 담고 싶어 졌다. 






식은 카푸치노를 한 모금 넘긴다. 

“엄마”

푸린양이 입을 연다.

“엄마가 타자고 했던 자전거 탈게.”

결심한 듯 진지한 얼굴로 말을 잇는다.

“나 해피밀 먹을래.”

이런, 배가 고팠나 보다. 어떤 버거로 주문할 까 물었다.

“버거는 아무거나 괜찮은데 선물로 주는 인형은 2번이야!”

붉으락푸르락하며 명연설을 쏟아내는 엄마를 앞에 두고, 푸린양은 줄곧 2번 키위새 인형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많은 말들은 어디로 간 것인가?




우리는 광장 앞에서 자전거를 빌려 시내투어를 했다. 푸린양을 가운데 두고 셋이 나란히 앉아 페달을 굴리기도 하고 아이들 둘이서 광장을 한 바퀴 돌기도 했다. 여느 때와 달리 사진도 잘 찍고 두 번 묻기 전에 척척 대답도 잘했다. 오늘 저녁은 숙소에서 간단히 먹자는 말에, 아이들은 군소리 없이 끄덕거린다. 낮에 퍼부은 잔소리에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지 않은 중딩군에게 마음이 쓰였지만 별다른 내색은 없다.


숙소로 돌아왔다. 주방에 들어가 쌀을 씻어 냄비에 밥을 안쳤다. 푸린양은 반찬통에서 먹을 만한 걸 꺼내 식탁에 올리고 있다. 평소 같았으면 침대에 누워 채팅에 정신없는 중딩군이 싱크대로 다가온다.

“오이무침은 내가 해 볼게.”

숙소 앞 슈퍼에서 사 온 오이를 씻고 있던 참이다.

“어떻게 하는지 엄마가 알려줘. 내가 만들어 볼게” 


소금을 뿌리고 고추장 몇 스푼을 넣어 쓱쓱 비빈 오이무침이 달고 맵고 시원하다. 아삭거리는 오이무침을 얹어 맛난 저녁을 먹고 영수증을 뒤적거리는 내 옆에 두 아이가 앉아있다. 도시 지도를 펼쳐두고 심각하게 의논 중이다.

“꼬맹아, 내일은 뭐할까? 우리 재미있는 걸 해보자!”

그 많은 말 중 몇 마디는 중딩군 안으로 스며들었나 보다. 

역시 명연설이었다. 


#여행에서만은_잔소리없는_우아한_엄마이고_싶었다_털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