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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춘희 Mar 02. 2019

넋 놓고 감탄하고픈 풍경을 원한다면

이탈리아_마테라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중딩군', 초2 '푸린양'과 함께 떠난 글 쓰는 엄마의 겨울 여행은 오스트리아의 짧은 이야기와 이탈리아의 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마테라 Matera라는 도시가 있다. 구석기시대에 형성된 주거 지역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는 아주 오래된 곳. 동물을 사냥하고 열매를 채집하던 머나먼 옛날의 모습을 간직한 도시라니, 우리는 궁금했다. 이탈리아 남부 바실리카 주의 내륙에 위치한 마테라는 로마에서 약 400킬로미터, 레체에서 약 200킬로미터 거리에 있다. 아득하게 먼 곳이 아님에도 도시는 ‘육지의 외로운 섬’이라 불린다. 대중교통편으로 접근하기에는, 갈아타야 하는 번거로움과 긴 시간을 견뎌야 하는 어려움 때문이다. 여행자가 드문 겨울철에는 대중교통마저 운행 횟수가 일정하지 않단다. 렌터카가 아니었다면 아이들과 여행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곳이다.



마테라에는 사씨 Sassi라는 동굴 주거지가 있다. 석회암을 파서 만든 동굴 집 사씨에 사람이 거주하게 된 시기는, 8세기경 이슬람 세력의 박해를 피해 이곳에 온 수도사들이 동굴 교회를 만들자 교회를 따라 농민들이주하면서부터이다. 사씨에서는 사람과 가축이 함께 생활했다. 당나귀, 닭, 개, 염소 등을 같은 공간에서 키웠으며 1960년대까지도 수도, 전기, 하수도 시설이 없었다. 이탈리아인들은 이 도시를 더럽고 가난한 반도 남부의 낙후성을 상징한다며 ‘제국의 수치’라 여겼다. 마테라가 외부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이탈리아 소설가 ‘카를로 레비’가 쓴 <그리스도는 에볼리에 머물렀다>라는 소설을 발표한 이후이다. 그는 마테라를 방문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탈리아 중산층이 외면한 이탈리아 농민의 비참한 생활을 실감나게 그렸다. 이로 인해 정부는 이 지역에 관심을 갖게 되고 생활터전의 열악함을 극복할 수 있도록 재건하기 시작했다.







마테라의 구시가지에는 당시의 동굴 주거지 형태를 개조하여 만든 동굴 호텔이 여러 곳이다. 우리가 오늘 머물 숙소도 동굴 호텔이다. 널찍한 더블침대가 놓인 객실은 동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깔끔하게 마감되어 흙가루가 날리지만 않을 뿐, 객실 안은 은은한 황톳빛이다. 아치형으로 흙을 파낸 자리에 딱 들어맞는 책상, 깊고 길쭉한 구유 모양의 흙 대야가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흙 대야에는 캐리어 두 개가 들어가고도 공간이 넉넉하다. 세면대도 황톳빛, 욕실도 온통 흙빛이다. 객실 한쪽 구석은 불투명한 유리가 바닥을 덮고 있는데 유리 아래는 ‘진짜’ 동굴이다. 실내 장식을 따로 할 것도 없이, 동굴이라는 공간을 한껏 활용했다.



짐을 풀고 동네 산책을 나선다. 여름엔 이곳도 관광객들로 활기차다는 데 지금은 겨울 한낮에도 인적이 드물다. 테이블이 세 개뿐인 작은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파스타와 파니니를 먹고 흥미로운 시내투어를 하기로 했다. 오토바이와 삼륜차를 연결한 독특한 탈 것을 타고 시내를 돌아보는 프로그램이다. 마테라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아 어디를 가야 할지 무엇을 보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는데 이 투어라면 유용하겠다.




janis-oppliger @unsplash


10분 후, 앞은 오토바이이고 뒤쪽엔 좌석이 연결된 삼륜 오토바이를 끌고 오토바이 주인장 마르코가 등장했다. 이탈리아 청년답게 허우대가 멀쩡하다. 금발 고수머리에 검정 선글라스를 끼고 청바지에 가죽 재킷을 걸쳤다. 삼륜 오토바이를 자신의 ‘페라리’라고 소개하며 껄껄 웃는다. 오랜만에 나도 크게 웃어 주었다. 이 정도 미모의 청년이 던지는 개그라면, 이 정도 리액션은 해주어야 옳다. 시동을 걸고 출발한다. 마테라 구시가지 일대를 쭉 돌아볼 것이며 사진 찍을 만한 멋진 곳을 알려주겠단다. 영어가 그리 유창하지 않으니 천천히 말하겠다고 얘기하며 미안해한다. 너그러운 손님인 양 대답했다.

“잇츠 오케이.”


사실 마르코의 설명을 도통 들을 수가 없다. 이탈리아 발음과 억양이 섞인 영어도 문제지만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너무 커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들리지가 않는다. 그저 열심히 설명하는 그와 간간히 눈을 맞추며 웃어줄 수밖에. 그의 설명을 제대로 들을 수는 없지만 그가 소개하는 마테라 구시가지는 독특했다.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도시 풍경은 삭막하다. 바위산을 파고 들어가 세워진 교회의 모습도, 층층이 쌓은 듯 지어진 동굴 형태의 집도, 비현실적이다. 도무지 사람이 살 것 같지 않고, 사람이 살 수 없을 것처럼 살풍경하다. 더구나 여행자마저 없는 겨울 오후의 마테라를 채우고 있는 건 메마른 겨울바람뿐이다.





"다 회색이야!"

푸린양이 정확하다.

구시가지는 온통 회색이다. 지붕도 담벼락도 길도. 흰색과 가장 가까운 색이면서도 그것이 가지는 분위기는 실로 다르다. 회색에는 흰색이 가지지 못한 무게와 어둠이 깃들어 있다. 빨래가 바람에 날리고 식당 문이 활짝 열린 걸 보면 사람이 사는 곳이 분명한데, 회색빛이 주는 모호함이 주민의 삶마저 의심하게 한다.

지구 상에 다시없을 모습을 하고 있는 동굴 교회에 들르고 사씨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광장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사씨가 마테라의 중요한 상징인 건 맞지만 줄곧 생기라고는 없는 회색빛 도시를 보고 있자니 사람이 그리워진다. 요란한 포옹을 하고 마르코는 떠나갔다.


우리는 시가지를 천천히 걸어 호텔로 돌아왔다. 기념품 가게에 들러 냉장고 자석을 몇 개 사고 수예품 가게 앞에서 세심하게 뜬 원피스 구경을 하며 걸었다. 서서히 해가 진다. 저녁은 간단히 컵라면으로 때우기로 합의했다. 가방을 뒤져 컵라면을 찾는 사이, 중딩군이 바람을 쐬겠다며 밖으로 나간다. 객실 밖은 바로 골목이다. 객실에는 전자레인지도 전기 주전자도 없다. 컵라면을 먹으려면 프런트로 가서 뜨거운 물을 담아 와야 한다. 내복 위에 외투를 걸친 푸린양과 함께 방 밖으로 나선다. 객실 밖의 낮은 담에 중딩군이 서있다. 이어폰을 꽂은 채로 도시를 바라보고 있다.


“엄마, 이런 풍경은 처음이야.”






중딩군 옆으로 나란히 서서 아이가 쳐다보는 풍경을 함께 바라본다. 그곳엔 낯선 도시가 있었다. 회색빛 투성이던 황량하고 건조한 낮의 도시 말고, 우윳빛 가로등과 창문으로 번지는 노란빛을 품은 은은하고 포근한 밤의 도시가. 톱만한 달이 걸려있는 검은 하늘 아래, 레몬빛으로 물든 고대도시가 새로 나타났다. 척박하고 고단했던 낮의 삶을 단숨에 잊게 만들 온화하고 보드라운 밤의 위로가, 도무지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이곳에서 살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한낮의 황량함과 한밤의 온화함을 모두 가진, 마테라의 풍경 앞에서 우리는 길을 멈추었다. 나지막이 감탄을 쏟아내며, 몇 번이나 하늘과 도시를 번갈아 쳐다보며, 외투 아래 내복 바지를 드러낸 채로 그렇게 오래도록.


#넋놓고_입벌린_채_감탄하고픈_풍경을_원한다면 #여기_마테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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