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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춘희 Mar 16. 2019

유럽의 도서관이 궁금해서

이탈리아_ 로마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중딩군', 초2 '푸린양'과 함께 떠난 글 쓰는 엄마의 겨울 여행은 오스트리아의 짧은 이야기와 이탈리아의 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바트이슐에서 베네치아행 밤기차를 기다려야 하는 오후, 도서관에 갔다. 

작은 도서관이다. 달팽이처럼 생긴 계단을 돌아 내려갔다. 책도 읽고 와이파이 잡아서 핸드폰도 하고 영수증 정리도 하고, 우리는 할 게 많았다.  ‘파리의 작은 카페에서, 오늘까지 보내야 할 원고를 쓴다’ 라던가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이 책의 에필로그를 여기, 런던에서 쓰고 있다’라는 글을 읽을 때, 글쓴이가 정말 ‘있어’ 보였다. 이번엔 ‘있어’ 보이는 외국에서 글쓰기, 그것도 할 참이다. 


우리뿐인 어린이 열람실을 천천히 돌아보다 서가를 가득 채운 보드게임을 찾아내고 말았다. 숫자를 이어 완성하는 ‘루미큐브’ 3판, 모두 중딩군 승! 무인도를 개척해 자원을 모아 마을을 발전시키는 ‘카탄의 개척자’ 3판, 몽땅 중딩군 승! 승부욕 강한 푸린양이 삐죽거리기 시작하는 걸 재빠르게 파악한 중딩군이 힘 빼고 게임한 끝에 푸린양 1판 승! 간신히 분위기 살렸다.





세 식구가 머리를 맞대고 게임에 열중하는 동안 동네 사람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엄마와 10살쯤으로 보이는 아들이다. 둘은 한참 동안 서가를 돌며 책을 뽑았다. 책이 수북이 쌓였다. 책을 품에 안은 아이가 달팽이 계단을 타고 위층으로 올라간다. 발끝을 툭툭 차며, 입술이 튀어나온 채로. 


저 표정, 안다. 내가 일하는 도서관에서 본 적 있다. 책을 양팔에 10권쯤 보듬은 초등 고학년 아이와 대출증을 들고 있는 엄마가 대출 데스크 앞에 서있었다. 아이가 들고 있는 책을 살피던 엄마가 뭔가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몇 권 더 빌릴까, 고민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잠시 후 마음을 정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아이에게 말했다.

“읽고 싶은 거 있으면 가져와.”

상냥한 엄마의 질문에 아이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읽고 싶은 게 있겠어요?”


아이의 목소리는 낮고 작았지만 서늘했다. 데스크에 앉아 있던 나는 고개를 들어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엄마와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엄마는 더없이 민망한 표정이었지만 아이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을 뿐 표정조차 없었다. 마치 ‘언제부터 내가 읽을 책을 내가 고를 수 있었죠?’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아이의 표정이다, 방금 책을 잔뜩 들고나간 오스트리아 소년의 표정이.       


중딩군은 책을 아주 좋아했던 아이였지만 중학생이 되자 책 읽기를 멈췄다. 좀처럼 다시 책을 집어 들지 않았다. 날벼락같은 일이었다. 중학생이 되었으니 시간이 부족하다는 걸 감안한다고 해도 심각했다. 전혀 읽지 않았다. 좋아할 만한 책을 잔뜩 골라 아이 눈 닿는 곳에 두었고 이런저런 이유로 권해 보기도 했다. 아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아, 그건 배신이었다. 





어느 날, 반전이 일품인 추리소설 한 편을 읽었는데 이 이야기를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다. 나만 이 반전을 눈치 채지 못했는지, 두 번째 단편이 최고였는데 당신은 어땠는지, 간절하게 공유하고 싶었다. 아이에게 슬쩍 권해보았다. 관심을 보였다. 아이는 그날 밤, 한 권을 읽어 내렸다. 다음 날, 우리는 그 책에 관해 흥미진진한 리뷰를 주고받았다. 한 달 후쯤, 그 작가의 새로운 소설을 또 한 번 읽었다. 다음 날, 우리는 전작에 비해 별로였다며 툴툴거렸다. 이제 우리는 그 작가의 소설이라면 무조건 읽고 언제나 리뷰를 공유한다. 추리소설뿐이다. 예전처럼 탐독하지도 않는다. 죽을 것처럼 심심해졌을 때만 책을 읽는다. 하지만 아이는 다시 책을 읽게 되었다. 엄마의 권유가 전부는 아니다. 어쩌다 눈에 띈 그 책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엄마와 함께 도서관에 나타난, 한국의 소년과 오스트리아의 소년에게는 스무 권 책 폭탄이 아니라 아이의 기호에 맞는 책 한 두 권이어야 한다. 스무 권 중에 마음에 드는 책을 네가 골라,라고 말하는 대신에 이 책 읽었는데 결론이 정말 뜻밖이었어, 한번 읽어볼래? 이 방법이 더 승률이 높다. 그래도 아이가 읽지 않는다면, 시간이 없어서 못 읽는 것이 아니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면 이 아이는 기다려 주어야 한다. 기다리다가 책을 읽을 날이 오지 않는다면 어떡하냐고? 스무 권씩 책 폭탄을 던져도 그날은 오지 않는다. 아이가 좋아하는 분야의 흥미로운 책을 어쩌다 권하다 보면 그날이 조금 앞당겨질 수도 있다. 포인트는 이것이다, ‘흥미’와 ‘어쩌다’.





이탈리아 레체에서 우리는 정확하게 물었다. 

“아이들이랑 함께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이 근처에 있나요?”

그랬더니 관광안내소 아줌마가 가르쳐 주었다, 그곳을. 그곳은 대학도서관이었다. 대학 도서관인데, 우리 같은 외국인 여행자가 이용해도 되느냐고 한 번 더 물었다. 그랬더니 오브 코올스, 라며 안내소 아줌마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시내 중심에서 20분쯤 걸어가니 대학교가 보였다. 주변 상가와 경계가 모호했지만 대학교였다. 가슴에 책을 품고 총총히 걷는 여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이곳이 대학교 맞느냐? 도서관은 어디 있느냐? 우리가 도서관을 이용해도 되느냐?라고 한 여학생에게 물었다. 학생은 그렇다, 고 대답을 잇다 마지막 질문에서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아, 네에, 이용해도 될 거예요.


도서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아이를 데려온 동네 아줌마나 외국인 여행자는 없다.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왼쪽에 앉은 직원 두 명이 고개를 들었다. 들어가도 되느냐 손짓을 했다. 직원도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편해졌다. 우리는 열람실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 학교 여학생과 도서관 직원이 한 박자 늦게 대답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곳은 대학 도서관, 우리가 대학 도서관을 떠올릴 때 그리는 바로 그 모습이었다. 칸막이 없이 오픈된 8인용 책상이 줄지어 놓여 있고 학생들이 빽빽이 들어앉아 공부하는, 책장 넘기는 소리와 스윽스윽 필기하는 소리, 다각 다각 자판기 두드리는 소리만 가득한 곳이었다. 






도서관은 만원이었다. 우리가 등장하자 열람실 내부의 모든 학생이 펜을 멈추었다. 평일 저녁 대학 도서관에 등장한 동양 아줌마와 청소년과 어린이를 200개의 눈동자가 지켜보았다. 우리의 움직임을 따라 도로록, 하며 그들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잘못 온 거 같다. 저 열람실 끝에 있는 서가 까지만 갔다 오자.”

당황하지 않은 척, 침착한 척, 뭔가 찾는 것이 있는 척, 그것이 없어서 안타까운 척하며 열람실을 나왔다. 

열람실 문이 닫혔다. 우리 셋은 동시에 숨을 몰아쉬었다.


 음료 자판기에서 찬 음료를 뽑아 벌컥벌컥 마셨다. 

대학 도서관, 그건 방문 리스트에서 지우기로 한다. 잠수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숨 못 쉬는 괴로움을 느끼고 싶지 않다. 200개의 눈동자와 100개의 침묵, 생각만 해도 목이 짧아진다. 






이탈리아 로마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일찍 짐을 정리했다. 

북경으로 떠날 비행기 시간인 오후까지 여유가 있다. 보고 싶은 곳도 모두 가 보고 먹고 싶은 것도 다 먹었다. 이제 하나만 남았다. 로마 도서관에서 놀다 오기. 다 꾸린 캐리어를 비앤비에 맡겨 두고 가벼운 몸으로 찾아 나선다. 공원 가운데 작은 도서관이 있다. 크고 높은 나무 출입문을 밀고 들어선다. 입구의 직원에게 신분증을 맡기고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레체의 도서관과는 달리 한가한 열람실을 속 편하게 둘러보고 잡지 비치대 앞 책상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 아이들은 독서를 할 참이다. 한 달 여행을 위해 중딩군은 SF 소설을, 푸린양은 공포 괴담집을 한 권씩 챙겨 왔는데 마지막 날까지 절반도 읽지 못했다. 오늘은 그걸 다 해치우고 로마를 떠날 계획이다. 나는 오늘에야말로, 여행 에필로그를 써볼 생각이다. 유럽 여행의 마지막 날 쓰는 여행 에필로그라니, 이보다 더 생생할 수 있겠는가. 







아이들은 책을 꺼내들더니 금세 빠져들었다. 푸린양은 두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오빠에게 보여주었다.

“이거 정말 무섭지?”

“풉, 무섭네.”

중딩군이 친절하게 비웃었다. 


여행 에필로그 글감이 떠오를 즈음, 흥미로운 인물이 나타났다. 남자 중학생이었다. 유난히 바스락거리며 등장하는 바람에 고개를 돌렸더니, 아이는 까만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슈퍼마켓에서 라면을 담을 때 쓰는 검은 봉지였다. 


아이는 까만 봉지를 책상 위로 올리더니 그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까만 봉투에서 나온 것은, 수학책과 빈 노트와 연필 한 자루였다. 귀신 이야기를 읽느라 가뜩이나 예민해진 푸린양이 부스럭대는 소리에 두리번거린다. 학생을 발견하고 진지하게 귓속말을 했다.

“저 사람은, 슈퍼에서 책을 사 왔나 봐.”


슈퍼에서 수학책을 사 왔을지도 모를 학생은, 아주 열심이었다. 두 아이가 가지고 책을 다 읽고 몸을 비비 꼬며 가자는 신호를 보낼 때까지 꼼짝하지 않고 수학 문제를 풀었다. 주섬주섬 짐을 꾸려 나서려는데, 학생이 책을 덮어 까만 비닐봉지에 담았다. 책과 노트와 연필 한 자루가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도서관을 나섰다. 

“비가 오니까, 책이 안 젖게 하려고 봉지에 담았나 봐.”

중딩군은 대단히 기발한 방법이라는 듯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기필코 글 한편을 써보리라 계획했는데 푸린양이 정말 무섭다며 들이미는 귀신 이야기를 읽느라, 소리 내어 신문을 읽는 건너편의 아저씨를 신경 쓰느라, 비닐봉지에 책을 담아온 이탈리아 중딩을 구경하느라, 시간을 다 보내버렸다.  

도서관 구경만 실컷 하고 ‘있어’ 보이는 외국에서 글쓰기, 결국 그건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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