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_베이징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중딩군',
초2 '푸린양'과 함께 떠난 글쓰는 엄마의 겨울 여행은
오스트리아의 짧은 이야기와 이탈리아의 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로마에서 베이징까지 11시간, 비행기에서 무엇을 했더라. 여행을 떠날 때는 매 순간이 생생한데 여행에서 돌아올 때는 언제나 희뿌옇다. 이번엔 아빠와 여행의 마지막을 보내려고 베이징을 경유하는 항공권을 구입했다. 로마에서 베이징으로 오는 비행기에서, 정신없이 잠을 자며 올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베이징은 우리 가족에게 처음이지만, 넷이라면 문제없을 것 같은 든든함이 있었기 때문에.
아빠가 왔다. 푸린양이 달려가 품에 폭 안긴다. 중딩군이 걸어가 살짝 안긴다. 지켜보던 나는 잔소리가 먼저 달려 나온다.
“밥은 잘 먹었어? 살이 빠졌는데? 바지는 그거 말고 다른 걸로 입지 그랬어? 빨래 안 했구나!”
내 차지였던 짐가방이 아빠 몫이 되었다. 아빠와 함께 하는 2박 3일 베이징 여행, 이럴 줄 알았다. 이렇게 마음 편하고 든든할 줄을.
“그러니까 여기서 어느 쪽으로 가는 거야?”
“우리가 출력해둔 지도를 보면 오른쪽인 거 같은 데….”
호텔을 찾아가는 길이 만만치 않다. 지하철역까지 거침없었는데 지하철역을 나서자마자 높이 솟은 빌딩과 넓은 도로 앞에서 나는 방향을 잃었다. 높아봤자 10층 쇼핑몰이고 넓어봐야 8차선, 대도시에서 흔해빠진 풍경인데 2천 년 된 로마에서 방금 도착한 우리는 넋이 나갔다.
“얼마나 가야 해?”
“700미터, 근데 이쪽 방향이 맞나?”
남편의 질문에 자꾸 목소리가 작아진다”
남편이 지도를 가져가더니, 방향이 잘못됐다고 한번, 이렇게 부실한 지도를 가져왔냐며 또 한 번 타박을 한다. 짧은 여행이라, 핸드폰은 와이파이가 연결되는 곳에서만 사용할 참이다. 지금 믿을 건 종이지도뿐이다.
남편이 호텔을 찾았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주 쉽고 간단히. 지도를 이리저리 돌리며 지하철역의 위치와 쇼핑몰 이름을 확인하더니, 여기다 하며 앞장선 곳에 호텔이 있었다.
“아빠가 바로 찾았지! 이렇게 지도도 못 보는 엄마하고 어떻게 여행을 다녔어? 푸린이랑 오빠가 고생 많았겠네.”
호텔을 내가 찾았어야 했는데. 2박 3일 동안 이 생색을 견뎌야 한다.
넷이 함께 머물 수 있는 가족실이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3인실에 보조침대만 들여놓았다. 보조침대는 매트리스가 얇고 길이마저 짧다. 우리 식구 중 다리를 뻗고 누울 수 있는 사람은 아홉 살 푸린양 뿐이다. 한 달짜리 짐가방을 들여놓자 호텔 방 입구가 꽉 들어찬다. 네 식구가 모여 앉은 호텔 방도 꽉 들어찬다.
저녁은 ‘베이징 덕’으로 먹자. 체크인할 때 호텔 직원이 ‘베이징 덕’ 전문점을 알려주었다.
호텔에서 가까운 곳이고 맛도 최고라며 칭찬한 곳이다.
“고리라는 쇼핑몰인데 금방 찾을 거래.”
지도를 들여다볼 때와 나는 달랐다. 목소리가 힘차고 발걸음이 씩씩하다.
“정말 고리가 맞아? 혹시 건너편에 있는 글로리 아니야?”
“직원이 영문 스펠링을 써줬다니까! G,O,R,Y 고리!”
길 건너 가까운 곳에 있는 쇼핑몰을 거의 다 지나쳤는데 ‘고리’라는 쇼핑몰은 보이지 않는다.
자꾸 묻는 남편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사라지고 있다.
주변의 쇼핑몰은 거의 다 지나쳤는데 '고리'라는 쇼핑몰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방향이라고 한 거 아니야? 제대로 들은 거지?"
"제대로 들었다니까. 고리 쇼핑몰. G,O,R,Y"
그런데 길 건너편 ‘글로리’ 쇼핑몰이 베테랑 여행자의 촉에 자꾸 걸려든다. GLORY와 GORY, 글로리와 고리. 호텔 직원이 헷갈렸다고 생각하기엔, 그녀가 내뱉은 고리라는 발음은 확신에 차있었고 그녀가 적어준 스펠링은 굵고 진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확인을 해야 할 것 같다.
식구들을 이끌고 글로리 쇼핑몰에 들어갔다. 그곳에 ‘베이징 덕’ 전문점이 있었다! 호텔 직원이 알려준 바로 그곳이다. 베테랑 여행자의 촉이라는 신비한 감각에 대해 설명하려는 내게 남편이 선수를 친다. 아까부터 고리가 아니라 글로리인 것 같았는데 말하지 않고 기다렸다나! 쳇, 어이가 없네. 특별한 요리를 먹을 생각에 들뜬 셋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족 완전체의 여행이 진정 행복한 선택인가에 대해서 깊이 고민해본다.
채 썬 파와 춘장이 없었다면 베이징 덕 한 마리를 다 먹기는 힘들었겠다. 바삭한 껍질, 부드러운 속살이 일품이었으나 네 번째 젓가락에서부터 느끼해졌다. 푸린양은 살코기 두 점을 먹고 나서 곁들여 나온 빵으로 배를 채웠다. 쇼핑몰을 구경하며 시원한 콜라와 개운한 아이스크림으로 입가심을 했다. 밖으로 나오니 해가 졌다. 백화점과 쇼핑몰이 환하게 조명을 밝혔다. 거리가 온통 반짝거린다.
“이렇게 밤에, 밖에 있는 건 처음이다”
문명세계에 처음 온 아이처럼 푸린양이 즐거워한다.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숙소로 돌아갔고 해가 지면 곧장 칠흑 같은 어둠이 밀어닥친 시골에 머문 적이 많았으니 도시의 환한 밤이 새삼스러울 수밖에. 어두운 도시를 아이들과 걷고 싶지 않았고 내 깜냥으론 도처의 위험을 물리칠 수 없었으니 별 수 없었다. 오늘은 괜찮다, 나 혼자가 아니니까.
보조침대에선 중딩군이 자기로 했다. 로마 공항에서부터 소중히 가져왔으나 몇 개 남지 않은 초콜릿을 나누어 먹으며 우리는 여행 이야기를 앞 다투어 늘어놓았다.
“아빠, 우리 기차 못 탔잖아. 그래서 무서웠어.”
무섭다고 한 번도 말하지 않았는데. 아빠를 쳐다보는 푸린양이 심각하다.
“아빠, 피렌체에서 저녁에 버스를 잘못 탔거든. 남자 애들이 짜증 나게 해서 진짜 화났었어.”
덤덤해 보였는데, 한 번도 흥분하지 않았는데. 아빠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중딩군이 진지하다.
나도 뭔가를 말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아이들이 그랬구나. 침착했고 담담했고 엄마를 묵묵히 기다려주었는데, 불안하고 걱정되고 화났었구나. 엄마가 있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투정마저 부리지 못했구나, 이 걱정 많은 엄마에게는.
남편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다.
“우리 푸린이 무서웠겠네, 우리 중딩이 걱정했구나.”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엄마, 참 대단하다.”
갑자기 눈이 뜨거워졌다. 나는 조용히 욕실로 들어갔다.
중딩군이 아빠와 함께 편의점에 갔다. 편의점 구경도 하고 야식거리도 사 온다며. 남은 우리는 시끄럽게 TV를 켜놓고 핸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침대에서 뒹굴었다. 가족 완전체의 여행이란, 이런 것이다. 한 치의 허전함도 없이 한 톨의 아쉬움도 없이 지금 하고 싶은 그것을 할 수 있는 것. 밤 11시의 편의점 나들이도 두려움 없이 할 수 있는 것. 가족 완전체의 여행이 진정 행복한 선택이냐고? 응, 그런 것 같다.
이번화를 끝으로, '글쓰는 엄마의 이탈리아 여행법' 연재를 마무리합니다.
읽어주신 모든 독자님들, 고맙고 감사합니다.
브런치 매거진에 담지 못한 '재미있고 의미있는' 이야기들이 여행 에세이 '글쓰는 엄마의 이탈리아 여행법'에 잔뜩 실려있습니다. 읽어주세요. ^^(굽신굽신)
사진 속 아홉 살 푸린양은 지금 중1 까칠 여학생이 되었고, 중3 중딩군은 18학번 정든내기 대학생이 되었답니다. 다음엔, 6학년 푸린양과 둘이 떠난 동유럽 여행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또 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