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스트리아_바트이슐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중딩군',
초2 '푸린양'과 함께 떠난 글 쓰는 엄마의 겨울 여행은
오스트리아의 짧은 이야기와 이탈리아의 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겨울여행이 가진 맹점은 푸른 바다를 제대로 즐길 수 없다는 것이다. 겨울여행이 가진 장점은 뜨뜻한 온천을 온전히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빈에서 기차로 두 시간, 많은 여행자들이 잘츠부르크로 가다가 혹은 빈으로 가는 길에 잠시 경유하고 마는 작은 도시에 우리는 머물기로 했다. 물놀이가 있어야 진정한 여행이라는 아이들의 여행을 완성시켜 보자.
바트 이슐 Bad Ischl은 온천 도시로 이름난 곳이다. 원래는 도시를 흐르는 강 이름을 딴 이슐이었는데 온천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온천을 뜻하는 바트 bad라는 명칭이 추가되었다. 조피 대공 부인이 아들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결혼선물로 별장을 선물하고 합스부르크 왕가가 머무르게 되면서 온천 도시로 명성을 드높이게 되었다. 프란츠 황제가 열여섯의 엘리자베트에게 청혼한 장소 역시 이 도시이다. 아름다운 자연과 예쁜 사랑을 품은 곳이다.
바트 이슐 기차역에서 가장 가까운 온천에 가기로 했다. 리조트 시설이 있는 큰 규모의 온천이라 숙박이 가능하지만 하룻밤 숙박비가 30만 원을 훌쩍 넘는다. 하루 숙박비 10만 원짜리 알뜰 여행자인 우리에겐 사치다. 주변 호텔에 머물며 일일이용권을 구입할 참이다. 우리가 머물 곳은 알프스풍의 외관이 이국적인 작은 호텔이다.
오늘 하루를 위해 날아온 수영복을 꺼낸다. 온천을 향해 가는 길, 아이들이 나는 것 같다. 앞서 가는 아이들을 눈으로 좇으며 나는 느릿느릿 걷는다. 나는 물놀이가 싫다! 딱 달라붙는 수영복도 싫고 젖은 수영복을 입은 채 있어야 하는 것도 싫고 수영을 못하니 튜브 잡고 떠다니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어서 싫고 미끄럼틀은 무서워서 싫다. 더구나 외국에서 물놀이라니! 그 사람들은 비키니만 입는다는 데, 수영선수 같은 민무늬 원피스 수영복을 입어도 되나? 실내에선 래시가드 같은 걸 안 입는다는 데, 그러면 입지 말아야 하나? 수영복을 헹구고 던져 넣을 짤순이는 있나? 그건 그렇고 외국 여인네들은 몸매가 환상적이던데….
발걸음이 점점 더 느려진다.
소문대로 탈의실은 남녀공용이다. 우리나라 워터 파크 탈의실과 똑같은 모양의 공간에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다. 미리 소문을 듣지 않았다면 탈의실을 몇 번이나 들락날락했을지도 모른다. 여자 탈의실이 맞는지 확인하러. 독일식 사우나 문화의 특징이다. 혼욕이 일반적이었던 고대 로마 시대의 문화가 그대로 이어져 온 것이다. 독일식 사우나에 들어갔다가 눈 둘 곳이 없어 당황했다는 글, 알고 갔으나 앉아 있기는 고역이었다는 글, 처음만 그렇지 시간이 지나면 별거 아니라는 글. 온천에 오기 전, 독일식 사우나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후기를 읽었다. 그중 기억에 남는 건 ‘엉덩이 아래 깔고 앉아야 하는 기다란 타월을 네로 황제처럼 어깨부터 허벅다리까지 늘어뜨린 채, 꼬고 앉은 다리를 한 번도 풀지 못했다’는 청년의 이야기였다. 한결 같이 그 공간은 적잖이 당황스러우며 담담한 적 애써야 하는 곳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 온천에도 사우나가 있다. 남녀 혼욕이며 누드로 입장해야 한다. 사우나만 그렇다. 그 외의 장소에선 반드시 수영복을 착용해야 한다. 달라붙고 젖은 수영복이 싫다고 투덜거렸지만 그것이 주는 안위를 되새겨보아야겠다. 탈의실은 남녀 구분이 없지만 옷을 입고 벗을 수 있는 탈의 공간이 따로 있다. 마치 옷 가게 피팅룸처럼 한두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칸막이 공간이 여러 개 마련되어 있다. 대부분의 이용자들은 탈의 공간에서 수영복으로 갈아입는다. 래시가드는 아무도 입지 않는다. 원피스 수영복 역시 아무도 입지 않는다. 환상적인 몸매도 아직 눈에 띄지 않는다.
마음이 바쁜 아이들은 종종종 걸어가 따끈한 물에 뛰어든다.
“엄마, 물이 짜!”
민물에 소금기가 녹아들어 있어 물이 짭짤하다. 물은 뜨겁지 않고 미지근하다. 여유롭게 수영을 즐길 수 있는 널찍한 실내 풀과 흐르는 대로 둥둥 떠다닐 수 있는 야외 풀이 연결되어 있다. 아이들이 야외 풀로 앞장선다. 2학년 푸린양이 일어서면 턱까지 오는 깊이이다. 의외의 깊이에 깜짝 놀랐다. 푸린양을 안고 둥그렇게 만들어진 물길을 둥둥 떠다닌다. 중딩군은 물 위에 누워 흘러 다니고 있다. 떠다니는 재미를 멈출 수 없다며 세 바퀴째 돌고 있다. 물길 중간에는 동굴 느낌을 주는 공간이 있다. 차가운 공기에 노출된 얼굴과 몸을 녹이는 곳이기도 하고 노오란 불빛이 은은해 분위기 잡기에 좋은 곳이기도 하다. 이런 곳엔 후자를 즐기는 커플이 있기 마련이다. 아니나 다를까 어린이 손바닥만한 수영복을 입은 젊은 커플이 동굴 구석에 있다. 자세히 보려고 한 건 아닌데 자꾸만 눈길이 간다. 저것들이!
콧물이 흐른다. 풀 가장자리에 기대어 잠시 쉰다. 몇 바퀴째 풀을 돌던 중딩도 멈추어 우리 옆으로 왔다. 물속에 잠긴 몸이 기분 좋게 따뜻하다. 맵고 찬 알프스 공기로 폐를 채우겠다는 듯, 우리는 열심히 심호흡을 했다. 아이들 코끝이 빨갛다. 훈훈한 실내로 들어가려는 때, 하얀 눈송이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새까만 하늘에서 작은 눈송이가 느릿느릿 떨어지더니 뿌연 수증기 속으로 사라진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프란츠 황제는 어머니에게 선물 받은 카이저 빌라를 여름 별장으로 사용하며 ‘지상의 천국’이라 칭송했다. 겨울밤, 따끈한 물에 몸을 담근 채 코 속으로 스미는 매운 겨울 공기를 들이마시는, 까만 하늘을 가르고 낙하하는 흰 눈송이를 날름 받아먹는 이 시간을 황제는 즐겨보았을까. ‘지상의 겨울 천국’이라 칭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훈훈한 실내수영장으로 들어와, 푸린양은 어린이 풀에서 미니 미끄럼틀을 타고 중딩군은 넓은 풀에서 수영 중이다. 물에 들어가 있는 사람보다 물가에 놓인 선베드에 누워있는 사람들이 더 많다. 다소 곤란한 점은 그들에게 별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가만히 누워 리조트를 구경하고 지나다니는 사람을 쳐다보는 게 전부인데, 그들 눈에 우리가 걸려들었다. 동양인 가족. 마르고 작은 여자아이, 토실한 남자 청소년 그리고 키 크고 마른, 수영선수 같은 수영복을 입은 아줌마. 그들의 주요 관심은 그중 아줌마였다. 이 작은 도시에서 수영복을 입은 동양 아줌마를 볼 일이 흔하겠는가. 기꺼이 그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다면 자랑스럽겠지만 동양여성의 몸매라는 것에 아직은 환상을 남겨주고 싶다. 서둘러 나왔다.
샤워실도 공용이다. 어린아이들은 수영복을 벗고 씻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수영복을 입은 채 몸을 헹군다.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던 탈의 공간에 들어가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사물함 앞에 섰다. 젖은 옷가지를 비닐봉지에 넣어 가방에 담고 신발을 꺼내 신으려고 할 때였다. 뒤편에서 느리게 외투를 벗고 있던 할아버지가, 눈 깜짝할 사이에 속옷을 내렸다. 허옇고 마른 궁둥이를 보고 말았다. 악! 외국 남성의 몸매에 대한 환상을 지키고 싶었는데.
그들은 비키니만 입었다, 수영선수 같은 민무늬 원피스 수영복은 아무도 입지 않았다. 그들은 래시가드 같은 것도 입지 않았다, 그래서 입지 못했다. 수영복을 헹구고 던져 넣을 짤순이는 없었다, 무겁고 축축한 빨래 더미가 가방에 들어있다. 외국 여인네들의 몸매가 모두 환상적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보다는 환상적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동굴 속에 머물던 커플, 그 언니의 몸매는 가히 환상적이었다. 외국에서 물놀이하는 거, 정말 싫다고 했는데 ‘정말’은 빼야겠다. 온천의 백미는, 역시 겨울밤 온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