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_제그로테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중딩군',
초2 '푸린양'과 함께 떠난 글 쓰는 엄마의 겨울 여행은
오스트리아의 짧은 이야기와 이탈리아의 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긴 여행 중, 간단히 몸만 떠나는 1박 2일 홀가분 여행을 한두 번 끼워 넣는다.
홀가분 여행이란, 크고 묵직한 그래서 고역인 캐리어를 호스텔에 맡기고 가뿐하게 떠나는 근교 여행이다.
빈의 인근 도시 제그로테 Seegrotte로 홀가분 여행을 떠나기로 한 날이다.
호스텔 체크아웃을 하고 커다란 짐을 모두 호스텔 보관실에 넣었다.
빈에서 기차로 40분, 뫼들링Mödling 역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262번 버스를 타고 이름이 이상한 정류장에서 내린 다음에 도보로 이동하면 호텔이 나오네.”
출력해온 구글 지도를 보며 중딩군이 노선 파악을 끝냈다.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는 역 주변을 벗어나더니 이내 마을 가운데로 들어간다.
“이번에 내리는 것 같은데?”
주섬주섬 짐을 챙겨 일어서려는데 버스가 정류장을 지나쳤다.
기사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방금 지난 정류장에서 내려야 했는데 못 내렸어요. 지금 세워주시면 안 될까요?”
“커브길이라 버스를 세우기가 곤란해요.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요.”
이번엔 내릴 채비를 완벽하게 갖추었다. 버스는 생각보다 한참 동안 달렸다. 마침내 버스가 멈춘다.
내리려는 우리를 기사 할아버지가 부른다.
“어디까지 가요?”
우리는 지도를 내밀었다.
할아버지가 셔츠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쓰고 지도를 살피더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 호텔에 가는 거라고요? 아까 지난 정류장 근처에는 모두 주택뿐이라 호텔은 없는 곳인데…. 방금 지나온 거리가 꽤 멀어요. 아이들이랑 걷기에는 힘들 거예요. 그냥 이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갔다가, 다시 타고 오면서 내려요. 그게 낫겠어요. 그 근처엔 호텔이 없는데….”
근처엔 호텔이 없다는 할아버지의 말이 걸렸지만 작은 호텔이라면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겠지 라고 생각하며 찜찜함을 털어냈다. 버스는 종점에 도착해 10분간 머물렀다.
버스가 다시 출발했다. 얼마쯤 지나자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손짓을 한다. 버스가 멈췄다.
할아버지 얘기대로, 근처 어디에도 호텔 같은 게 있을 것 같지 않다.
인적 드문 한적한 교외 주택단지이다. 이제 다음 경로를 찾아 이동해보자.
“헉! 이게 뭐야?”
프린트해온 구글 지도를 보며 우리는 깜짝 놀랐다.
구글 지도는 이렇게 안내하고 있었다.
‘262번 버스(15개 정류장, 19분), Gießhübl Gemeindeamt 정류장 하차, 도보(4km, 49분)’
지도가 알려주는 대로라면, 우리는 이 정류장에서 언덕배기 길 4km를 약 49분 동안 걸어야 한다.
성인 걸음으로 49분이라면 운동 안 한 아줌마는 두 시간, 발목 아픈 꼬마는 세 시간이라는 의미이다.
왜 우리는, 이 경로를 인지하지 못했을까? 이 정도로 걸어야 하는 거라면 미리 호텔에 전화를 해서 다른 방법이 있는지 확인했을 텐데 말이다. 미루어 짐작했던 나의 불찰이다. 인터넷 길 찾기를 할 때, 도보 구간이 포함되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20분 이상 도보로 이동해야 하는 경우를 본 기억이 없다. 걷지 않아도 되는 다른 교통수단이 반드시 있었으니까. 때문에 이 지도를 손에 들고 몇 번이나 들여다보면서도 ‘도보’라는 방법에만 집중했을 뿐 ‘49분, 4km’에는 집중하지 않았던 것이다.
호텔에 전화를 걸어 다른 방법이 있는지 물었다. 전화를 받은 호텔 직원은 우리 위치를 묻지도 않고 택시회사 번호를 불러준다. 우리의 당혹스러움이 전달되지 않은 모양이다.
현지 전화통화가 가능한 푸린양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택시입니다.”
“여기로 와 주실 수 있나요?"
"지금 어디에 있어요?"
"그러니까, 어, (버스 정류장 이름을 도저히 읽을 수가 없다!) 버스정류장에 있는데 이름을 못 읽겠어요. 262번 버스 종점에서 시내 방향으로 10분쯤 내려온 지점에 있는 정류장인데, 정류장 앞에 우체국이 있어요. 지금 거기에 있어요.”
“어디라고요? 버스 스탑이요?”
“네, 포스트 오피스 앞에 있는 버스 스탑이요.”
“버스 스탑이라고요?”
“버스 스탑인데, 포스트 오피스 앞에 있다고요!”
수화기 건너편 여자는 버스 스탑과 포스트 오피스를 구별해서 듣지 못한다.
몇 번 되묻더니, 알았다며 전화를 끊는다. 알아들은 걸까?
잠시 후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엔 택시 기사다. 그 역시 버스 스탑과 포스트 오피스 사이를 몇 번 방황하더니 맥 빠진 목소리로 오케이라며 전화를 끊는다. 우리의 근심은 더욱 깊어졌다. 과연 택시가 올까?
행인 하나 없는 휴일의 교외 주택가, 문 닫은 우체국 앞에서 우리 셋은 사막의 미어캣처럼 고개를 빼고 도로 양쪽을 노려보았다. 5분이 지났다. 택시도 나타나지 않고 전화도 없다. 더 기다려야 하는 걸까?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게 전달이 됐을까?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감이 커진다.
그때 길 건너편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이 거리에서 서성인 지 20분 만에 처음으로 목격한 생명체다.
몸에 딱 달라붙은 트레이닝 복을 입고 헤드폰을 낀 채 달리고 있다. 우리는 길을 건너, 그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당황한 표정으로 멈춰 섰다.
“저희 좀 도와주시겠어요? 호텔로 가려고 택시를 불렀는데 1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아서요. 택시회사에 전화해 주실래요?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아서요. 부탁드려요.”
조깅 남자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지퍼백에서 핸드폰을 꺼낸다. 호텔 이름이 적힌 종이를 보고 검색을 하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금세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 푸린양 핸드폰에 방금 전화한 택시회사 번호를 입력해 넣는다.
“택시는 10분 내에 도착할 거예요.”
남자는 허리춤 지퍼백에 핸드폰을 다시 넣고 달려갔다. 꾸준히 운동한 남자의 뒤태라니, 오랜만에 실물로 목격한 아름다운 실루엣이다.
택시가 도착했다. 조깅 남자가 부른 택시였다.
쉼 없이 깜박이며 요금을 올리는 미터기에 집중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택시 회사인데요. 우리 기사가 당신들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갈 수가 없대요.”
아이고 잘 됐네요, 할 뻔했다.
“오지 않아도 괜찮아요. 고마워요.”
먼저 통화한 택시가 허탕을 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잘 해결되었다. 버스 스탑과 포스트 오피스 덕이다.
내 발음이 문제인지 그들의 청취력이 문제인지 알 수 없으나, 아무도 낭패를 당하지 않은 건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었던 두 단어 덕이다.
16유로. 미터기가 멈췄다. 호텔 정문 앞이다. 도보 49분을, 돈 2만 원과 맞바꿨다. 호텔로 들어서려는데 왼편 도로가에 익숙한 것이 눈에 띈다. 아까 우체국 앞에 서있던 버스정류장 표식이다. 버스가 다닌다고?
호텔 앞에 서는 버스가 있었다. 그것도 두 대씩이나! 나는 확인하지 않을 것이다. 저 두 대의 버스가 뫼들링 역에 멈추는지 알아보지 않을 것이다. 만약 저 버스들이 뫼들링 앞에 떡하니 멈추고, 이 호텔까지 한 번에 도착한다면, 나는 미국으로 전화를 걸지도 모른다. ‘구글 길 찾기’ 담당자를 찾아 16유로를 내놓으라고 할지도 모른다. 한 번에 오는 버스를 두고, 산 중턱에 우리를 내리게 한 ‘구글 맵’의 저의가 무엇인지 따져 물을 지도 모른다. 내 발음을 알아듣거나 말거나!
(결국 읽지 못한 버스정류장의 이름은 ‘Gießhübl Gemeindeamt’이다. 도전해 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