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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lla Jun 27. 2022

#5. 애도하는 중입니다.

나의 해방일지


「나의 해방일지」는 퇴사 이후의 제 삶과 생각들을 기록하는 곳입니다. 끊임없는 도전과 성취, 실패의 경험들을 진실되게 담아내고자 해요. 현재 저는 자유롭고 평안한 삶 속에서 기초를 견고히 하는데 힘쓰며, 창조적인 일들을 해내고 있고, 앞으로 더 잘 될 것입니다.

바람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을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모두 더욱 잘 될 운명입니다.'


#그리운엄마 #보고싶습니다 #미안하고사랑합니다

#애도하는중입니다



트라우마. 내겐 새벽에 울리는 전화는 공포이다.  

그 시간에 울리는 전화는 늘 좋지 않은 소식을 전했기 때문에.

작년 10월 3일 새벽에 걸려온 전화도 그랬다.


척추골절로 입원하신 엄마가 골절치료를 위해 폐에서 물을 빼는 시술을 받고 회복하던 중 심장마비가 왔다는 병원 측 연락이었다. 심폐소생술로 간신히 호흡이 돌아왔지만 가망은 희박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난 마지막 말에 희망을 가졌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부랴부랴 옷을 대충 걸쳐 입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설마...'라는 생각으로 그 상황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의식을 잃은지 3일 만에 두 번째 심장마비로 그렇게 갑자기 내 곁을 떠나셨다. 흰 천이 덮인 엄마를 부여잡으려고 떼를 쓰며 짐승처럼 울부짖던 나는 온몸의 혈관이 다 터져버릴 것만 같은 분노와 슬픔을 느꼈다. 그 후로도 몇 달간 난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누군가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이 터져 나왔다.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셨을 즈음에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내 삶을 더 보살펴야 한다는 이유로 아픈 엄마를 최소한으로만 챙기고 외면하는 모질고 나쁜 딸이었다. 그게 큰 죄책감으로 남아 나를 괴롭힌다.


코로나로 인한 면회 불가로 입원해 계시는 동안 얼굴 한번 보지 못했다. 아니 입원하기 전에도 한 동안 엄마를 찾아뵙지 못했다. 평생을 매일같이 걸려오는 용건 없는 엄마의 연락은 불편했고 귀찮았다. 통화할 때마다 아프다고 말하는 나약한 엄마가 싫었고, 그 전화를 받고 나면 한동안 우울해지던 내가 불쌍했다.

 

엄마의 병이 시작된 것은 내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렸을 적이라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엄마는 어떤 사건으로 정신적 충격을 받아 우울증에 시달렸던 것 같다. 집의 금고에는 돈대신 항상 약이 쌓여 있었고, 수시로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아빠는 하시던 가게를 접고, 집과 가게를 판 돈과 적금을 깨서 엄마의 병원비로 썼다. 어떤 때는 엄마의 병세가 심해져 몇 년 간 말을 못 하신 적도 있었다. 실어증이었는데 이유를 모른단다. 용하다는 점쟁이를 데려다가 굿도 참 많이 했다.

가세는 빠른 속도로 기울었고, 제대로 끼니를 챙겨 먹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하루는 칼국수가 너무 먹고 싶어서 아끼던 돼지 저금통을 깨서 밀가루를 사다가 동생과 함께 칼국수를 해 먹으려 했다. 조막손으로 칼국수는 무리였는지, 어렵게 잘라놓은 면들이 들러붙어 수제비가 되었다. 간장으로 국물을 낸 그 수제비 맛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가족들은 이렇게 먹을지언정 아픈 엄마가 드실 밥은 꼭 소고기 뭇국을 끓여서 챙겨주시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엄마를 포기하지 않으셨지만, 엄마는 스스로의 생을 포기하려 했다. 모두가 잠든 사이 엄마는 칼로 자신의 손목과 목을 그었고 피가 뿜어져 나오는 소리에 내가 가장 먼저 잠이 깼다. 한방에 모여 자던 시절이었기에 엄마가 죽어가던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보아야만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다행히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고 몸은 회복되었지만, 엄마의 병은 그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그 병은... 마음만은 소녀였던 엄마의 몸을 더 약하고 늙게 만들었다. 그 병은 한창 사춘기였던 나와 남동생의 마음을 야위게 만들었다. 그 병은 아빠를 지쳐 쓰러지게 만들었다. 내가 성인이 된 후에는 아픈 엄마와 지친 아빠를 함께 보살펴야 했다. 그저 숙명으로 받아들였기에 억울한 것도 더 특별히 힘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잘 버텨왔는데 돌아가시기 전 6개월.

원하던 새 부서로 발령받아 적응 스트레스로 힘들었던 나를 보호하고 싶었던 마음에 엄마를 멀리했던 그때... 하필 그때, 엄마가 돌아가셨다. 그게 너무 억울하다. 엄마와의 마지막 시간을 그렇게 보낸 것이 너무 후회되고 괴롭다.


병원에 계신 엄마와 통화연결이 되었을 때, 아빠랑 남동생은 내가 잘 신경 쓸 테니까 엄마는 치료 잘 받으시라는 딸의 말에 '그래 네가 고생이 많다. 아빠랑 00(남동생)이 잘 부탁한다'는 말이 엄마의 유언이 되어 내 가슴에 박혀버렸다.

내일은 엄마가 돌아가신  맞는  아버지 생신날이다.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뭐라도 더 신경써드려야한다는 마음과 모든 것을 놔버고 싶을 만큼의 아픔이 뒤섞여 있다.


난 아직도 엄마 생각이 두렵다. 병마와 평생을 싸웠던 엄마의 고된 삶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얼마나 괴로웠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엄마의 삶은 왜 그래야만 했을까...


혹여나 병원이나 마트에서, 심지어 길을 걷다가도 엄마와 조금이라도 비슷한 또래의 여성을 보면 마음이 하염없이 무너진다. 길거리에서 청승맞게 울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으니, 한숨 한번 크게 쉬고 내 감정을 외면한다. 다시 멀쩡한 사람처럼 내 갈길을 간다. 그러다 감정이 빵빵한 풍선처럼 부풀어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날에는 방구석에 처박혀 소리 없이 꺼이꺼이 울어댄다.


난 오늘도 이렇게 애도하는 시간을 보낸다. 이렇게 울다 보면 눈물도 마를 날이 있겠지.  무거운 마음 또한  숙명일테니.


오늘따라 엄마가 더더욱 그립다.

건강하고 좋은 삶으로 다시 태어나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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