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가을스러운' 중년의 워킹맘
남편이 사무실로 출근한 날이다. 아이들의 라이드가 모두 내 몫이 되는 날이기에 아침부터 마음이 부산해진다. 긴장감 때문인지 더욱 일찍 눈이 떠진 아침, 부리나케 도시락을 싸고 이번 주 남은 날들을 위한 먹거리 리스트를 만든다.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곧바로 마트로 직행,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한 아름 장을 보고 나온다. 나오는 길 그 앞에서 친한 언니를 만나고 반가운 인사를 나눈다. 육아, 일 모든 것에 있어 열심인 베테랑 워킹맘으로 누구보다 나를 잘 이해하는 언니다. 그런데 언니의 모습의 깜짝 놀랐다. 몇 달 전 풀타임 재택근무가 가능한 회사로 옮긴 언니의 얼굴은 피로감으로 심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얼마 전 새 회사는 어떠냐고 통화할 때에도 "전 회사보다 오히려 일이 너무 많고 매니저라는 직함에 이곳저곳 관리를 다 하다 보니 도통 무슨 일을 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다."라고 하소연했었는데 언니의 얼굴은 그 생활이 여전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면서 100% 이해되는 마음.
재택근무라 하면 혹자가 보기에는 "출퇴근 안 해도 되고" "아이들과 집에서 누릴 수 있는 시간이 많은" 최고의 근무 환경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막상 그 기간이 계속적으로 지속이 되고, 직급도 올라가다보면 (직급이 올라갈 수록 일의 양이 폭발적으로 많아지는 미국의 직장 생활에서는) 내 삶의 균형을 잃기 십상이다. 자칫 나 만의 삶의 페이스를 잃게 되면 몰려드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하루 종일 컴퓨터에 붙어 앉아 일에 매몰되기 쉽다. 게다가 직장 30년 차가 훨씬 넘은 언니의 위치를 생각해보면 그 일의 범위의 양은 실로 엄청날 듯하다.
"나 그저께 새벽 두 시에 일하다가 결국 울었잖아."
언니가 나를 보자마자 던 진 첫마디. 아이들과 남편에게도 끔찍이 잘하는 슈퍼우먼 언니는 체력과 정신력의 한계를 넘어선 하루하루를 계속적으로 보내고 있었다.
"남편은 왜 그러고 있냐, 회사한테 그 일은 못하겠다고 빨리 말하라고 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게 쉽지 않아."
남들 말이 틀린 말도 아니지만 언니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소심함 때문이 아니다. 언니야 말로 누구에게나 자기 주장도 잘하고 리더쉽 있는 스타일. 빠릿빠릿한 젊은 아이들이 선호되는 언니의 직업 분야에서 '못하겠다'라고 말하는 것은 곧 언니에게 있어 '내 능력이 안돼서 이 자리의 역할을 못하겠다.'라는 말이었으리라. 그러면서 '젊었을 때는 날밤 새는 것도 식은 죽 먹기인데 12시만 되면 멍한 상태가 지속되니 서럽다'는 언니의 말을 들으니 요즘 내 생활을 꼬집는 것 같다.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항상 노력하면서도 불안해하는 중년의 직장인들이라면 당연히 이해될 만한 심정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가을이 온 것도 몰랐어. 오늘 창밖을 보니 벌써 단풍이 하나 둘 지더라. 예쁘면서도 나뭇잎이 떨어지는 걸 보니 이상하게 슬픈감정이 들더라."
어찌 보면 우리의 지금 나이 또한 인생에 있어서 '가을로 접어드는 시기' 가 아닐까 싶다. 노랑, 초록, 빨강... 다채로운 단풍의 색만큼 엄마, 아내 및 직장인으로 다양한 역할 속 많은 감정들 사이를 오가며 나름의 삶을 꾸려가는 우리들. 겨울의 시점에서 회고해 봤을 땐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 시기'일 수 있겠다. 그러나 그 화려함이 입혀지기 까지 우리는 여름 같이 싱그러운 '지난 날의 청춘'과 헤어짐을 고해야 했고, 시간이 갈수록 자연의 순리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자기 안의 여러 심경의 변화를 경험해야 했다.
언니에게 작은 위안이라도 주고자 나 역시 요즘 정신없다며 내 일상을 하소연한다. 실제로 '잘할 수 있다'는 주변의 격려조차 부담으로 느껴지는 요즘이라며.
"남들과 비교해보면 요즘 내 능력이 C처럼 느껴지더라고. 그런데 우리는 나이도 있으니 다른 사람과 같은 기준이면 안되겠지? 지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C는 남들의 A+일 거야. 그렇지?"
나에게 위안을 주려는 언니의 말에 마음이 한 숨 놓이는 기분이다.
"그럼~ 언니도 A+로 잘 지내고 있는거야. 우리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면 되지 뭐."
웃으며 마무리되는 마트 앞 아침수다. 서로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전하는 큰 '파이팅'이었다. 나를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낀다. 돌아오는 길, 하나 둘 늘어나는 단풍이 더욱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어느 계절보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가을처럼 우리의 오늘도 이렇게 물들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