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대화가 들린다.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 외국인을 만난 우리나라 사람이었다. 영국식 악센트를 쓴다. 멋을 부리는 건지 원래 그렇게 배운 것인지 알 수는 없다. 영어 잘하니 부럽다. 생기기는 별로 영어 잘할 듯이 보이지 않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서는 고개를 거두고 보던 책이나 다시 보던 중이었다.
"저는 맥주 한 잔이요." 카운터에서 들려온 주문하던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영어 목소리와는 확연히 달랐다. 보고 싶던 목소리. 어디서 들어봤더라 그런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항상 김동률의 답장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를 생각했으니까. '나 그때로 다시 돌아가 네 앞에 선다면.' 카운터의 그분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기에 다시 유심히 봤다. 눈매가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목소리가 비슷한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그리울 때면 사진을 봤다. 사진을 보고 또 볼 수록 조금씩 아무렇지 않아 졌다. 어느 순간부터 그립지는 않았다. 그때가 좋았지 정도. 그 뒤 언젠가 스쳐 지났던 그는 사진 속 모습과 전혀 달랐다. 시간이 지난 자연스러움인지 세월의 역습인지, 아니면 내가 변한 탓인지 알 수 없었지만 사진 속 모습은 아니었다. 어쩐지 더 이상은 그리워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리워하던 대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젠 그립지 않다 싶었는데 우연히 들린 그 목소리, 그 음의 높낮이와 말투는 기억하지 못했던 다른 감각들을 불러냈다. 조용히 어떤 일에 대해 얘기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하호호 웃던 일이었다. 장면보다 목소리로 떠올랐다. 장난스럽기도 했던, 알면서 궁금해 하는 척 했던 그 어조도 들렸다. 정말 행복한 일들은 대개 사진으로 남아 있지 않았기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까만 커피를 한 입 머금었다. 입 안에 조금 단 맛이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