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승
그만 생각해. 언제까지 그 일에 매달릴 거야?
큰아이의 초등학교 입학 등록을 마치고 돌아온 뒤로 마음이 자꾸 흔들렸다. 네 아이를 챙기며 분주한 저녁 시간이 흘러갔고, 평소처럼 아이들을 재우다 보면 나도 함께 잠드는 게 보통이었다. 아이들 곁에 누우면, 부드러운 살결이 피부에 닿는 느낌이 포근했고, 꼭 붙어 있는 작은 몸들 사이에서 풍겨오는 특유의 체온 섞인 냄새가 마음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그 따스하고 익숙한 감촉이 어느새 나를 깊은 잠으로 데려가곤 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눈은 감겼다가도 자꾸만 다시 떠졌다. 생각이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몸은 익숙한 평온 속에 있었지만, 마음은 그 안에 머물지 못했다. 그 마음을 붙잡고 있던 건,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온 우편물 도착 안내서였다. 아직 받아보지도 않은 그 봉투가, 첫 번째 빚독촉이 있었던 일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밤이 깊어가고, 나는 거실 식탁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막내를 재우고 방에서 나온 아내가 등 뒤로 다가왔다. 뒤에서 내 어깨를 바라보는 듯 잠시 멈춰 서더니, 이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를 타이를 때처럼 단호하지만, 그 안에 걱정이 배어 있는 말투였다. "그만 생각하라니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내를 바라봤다. 아내는 눈길을 피하지 않고, 조심스레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혹시 아버님과 관계된 일이고, 설령 안 좋은 일이라 해도. 이 일도 좋은 쪽으로 이어질 거야." 그 말에 나도 모르게 긴 숨이 새어 나왔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밤은 여전히 깊었고, 마음속 불안도 깊어가던 그때, 아내의 손끝에서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주말을 넘기고 받아 든 봉투 안에는, '당사자표시정정 신청서'와 '답변서 양식'이 들어 있었다. 두 번째 빚독촉이었다. 이미 끝난 일인 줄 알았는데, 다시 시작되는 것 같아 덜컥 겁이 났다. 법률 대리인을 다시 선임해야 할지, 절차상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닌지 불안감이 밀려왔다. 다시 법률 사무소에 문의했더니, 한정승인을 받은 결정문으로 대응하면 된다는 답변을 들었다. 여러 번 생각 끝에, 이번엔 스스로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사건은 전자소송으로 진행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답변서'를 작성해 법원에 제출하는 것이었다. 답변서는 한 달 이내에 제출해야 했다.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으면 법원은 원고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무변론 판결을 내릴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원고가 주장한 모든 내용에 대해 기각을 요청했고, 그 근거로는 앞서 받은 한정승인 결정문을 제시했다. 관련 자료를 첨부해 전자소송 시스템에 업로드하고, 제출까지 마쳤다.
아버지가 오랜 시간 거주지 불명인으로 숨어 지내는 동안, 법원은 아무런 반론 없이 무변론 판결을 내렸다. 원금은 십여 년 간 이자에 삼켜져 불어났고, 시간이 지날수록 빚의 몸집은 더 커져 있었다. 결국, 아버지와 현실 사이에는 점점 더 높은 벽이 생겨났고, 그 벽은 아버지를 사회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고인을 대신해 열었던 그 방안엔, 낙첨된 로또 종이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차마 버리지 못한 낙첨된 종이들. 그 위에 놓였을 미련과 마지막 기대, 그 마음이 조금은 이해됐다. 하지만 그런 이해와는 달리, 남겨진 현실의 벽은 높았다.
변론기일이 잡혔다. 그날, 법정에는 여러 건의 소송이 연이어 진행되고 있었다. 대부분의 피고석은 비어 있거나, 법률 대리인이 대신 출석해 있었다. 나는 ‘서울중앙지방법원 2별관 102호’ 법정의 피고석에 앉았다. 멀리 제주에서 서울까지 올라왔다. 두 눈으로 이 일의 마지막을 확인하고 싶었다. 내 차례가 되자 짧게 변론을 마쳤다. 그리고 판사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판결을 말했다.
원고, 승
그건 내가 졌다는 말이었다. 머릿속이 멍해졌다. 잠시 멈칫한 사이, 다음 사건이 바로 호명되었고, 법정은 공장처럼 판결이 이어졌다. 나는 대기석에 앉은 채로 한참을 움직이지 못하다가,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법정을 나갔다. 복도 한켠, 무료 법률 상담소가 눈에 들어왔다. 좀 전에 들은 판결에 대해 더 알고 싶었고, 그 의미를 이해하고 싶었다. 상담을 맡은 분이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그분이 말하길, 판결은 아버지의 남은 재산만으로 빚을 갚으라는 내용이었다. 그건, 남은 재산이 있다면 원고가 그것을 찾아내야 했고, 그 책임이 나에게까지 이어지진 않는다는 것이었다. 법정에서 들은 ‘원고, 승’이라는 말은 아버지의 책임이라는 뜻이었고, 그 판결은 아버지에 대한 것이었다.
나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