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은, 내가 의뢰를 받고 진행했던 번역이 사실은 테스트였다는 말을 전해왔다. 아직 책을 몇 권밖에 내지 않은 신생 출판사인데 서로 상생할 수 있는 번역사를 찾고 있었다고. 물론 열정 페이가 아니라 정당한 대가와 대우도 해준다고 했다.
34명의 블라인드 테스트 결과, 세명 정도가 추려지는데 한 번 더 테스트를 치를 수 있냐고. 그 물음에 나는 쭈볏쭈볏 망설였다. 내가 세 사람 중 한 명에 속한다는 사실에 기뻤고, 생각보다 엉망진창으로 번역하는 전문 번역가가 많다는 말에 놀랐지만, 무엇보다 이상황에서 중요한건 '의심'을 해보는 것이었다.사기꾼인지 아닌지. 그 이유는 내가 원해서 진행한 테스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런 제안을 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테스트는 무상으로 진행하는.. 거죠?무상이라면 많은 페이지는 진행할 수 없습니다."물론 그때의 나로선 열정 페이라도 덥석 받고 진행하고 싶을 정도로 열정이 가득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니깐 확실히 물어봐야 한다. '확실한 믿음 없이 이 일을 진행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쭈볏쭈볏 건넨 물음에 "당연히 비용을 지불하죠."라는 명쾌한 답이 돌아왔다. 오! 나는 이 기회를 잡아야 한다.
이건 기회다. 돈을 받고 테스트를 진행하다니! 밤낮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번역을 진행했다. 글을 다듬고 또 다듬었다. 그 뒤론 합격. 아직은 출판할 정도의 수준은 아닌 건 사실이지만, 이후에 충분히 발전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며, 계약서와 함께 번역 자료를 보내왔다. 계약서를 작성하니 계약금도 떡하니 통장에 꽂혔다. 이 모든 과정이 순식간에 이뤄졌다. 이제 나는 퀄리티 있는 번역으로 보답할 차례다.
두 권의 책을 할당받았다. 물론 한 권이 끝난 후 다른 한 권을 진행하기로 계약했다. 내가 다른 한 권을 진행하는 동안 이전에 작업한 번역은 편집자가 꼼꼼히 살펴보고 피드백을 주는 과정이다.
한권의 책을 번역하기 위해 최소 한 달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것도 초본 정도의 수준. 그래도 시간 관리는 오히려 더 편했다. 매일 스스로 할당량을 정해서 진행하니 번역도 재미있었다. 한 가지 문제점은, 나는 이과 출신으로 경제에 관해 깊이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혼자서 이리저리 공부를 해봐도 수박 겉햝기식으로의 공부밖에 되지 않았다. 전문 용어를 찾아보느라 진땀을 빼기도 했다. 결론은? 생각보단 실망스럽다는 답이 돌아왔고, 진행하고 있던 두 번째 책의 번역을 잠시 멈춰야 했다.
피드백을 받고 난 후 다시 내 글을 들여다보았다.허점 투성이었다. 뚝뚝 끊기는 느낌도 많았다. 매끄러워야 한다. 그러면서 원작자의 의도를 벗어나서는 안된다. 매뉴얼, 계약서, 설명서 등등이 아니라, 출판 수준의 번역! 그게 필요하다. 두 번째 수정, 다시 피드백, 세 번째 수정, 다시 피드백. 그리고 내 이름을 넣지 않기로결론이 탕탕. 실망스럽고 절망스러운 과정이 이어졌다. 내 한계를 자꾸만 지적당하고, 더 끌어올려야 한다고 채찍질당하다가 결국 이게 한계라며판결을 당한 느낌. 끊임없이 제자리걸음만 하는 기분.
배워보지도 않은 분야를 이 정도까지 끌고 온 건 대단한 일이야.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정성을 들인 번역본이 나의 이름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건 슬픈 일이었다.
"혜민 씨가 번역하면서 이해 안 되는 부분은 독자도 이해를 못해요. 본인이 확실히 이해하고 진행해야 돼요."
당연한 말이다. 정말 당연한 말이다. 왜 나에게 기회가 오지 않을까 찡찡댈 시간에 책이라도 한 권 더 읽고, 공부라도 더했었어야 했다. 프리랜서에게 부업이 중요한 이유는 시간의 안정화와 수입의 안정화를 위해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뿌리가 튼튼한 주업이다. 공부도 결국 투자다.
그나마 다행인 건 수정하고 피드백받는 과정에서 나의 번역 실력은 생각보다 훨씬 많이 향상되었고, 혼자서 공부할 때보다 훨씬 더 성장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는 두 번째 책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길을 잃은 배 한 척이 드디어 등대를 찾은것이다.
프리랜서는 멈추지 않고 배워야 한다. 받은 만큼 투자도 해야 한다. 그 분야가 무엇이든. 그리고 어디에서든 누구에게서든 배우며 나아가야 한다. 나라는 사람이 하나의 상품이기 때문에 뒤처져선 안된다. 멈추고 도태되는 순간 다른 프리랜서가 내 자리를 떡하니 차지할 것이다. 수십 년간 바이올린을 켠 할아버지에게 왜 아직도 연습을 멈추지 않냐고 물으니, 아직도 매일 조금씩 느는 것 같아서라고 답한 한 인터뷰가 생각난다.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기 위한, 조금의 차이를 만들기 위한 노력. 회사도 마찬가지다. 나 없이 안 굴러갈 것 같더니, 내가 퇴사해도 회사는 잘만 굴러간다. 처음부터 나란 사람이 없었던 것처럼 되는 건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나의 두 번째 책, 아니지 실상은 '공동 역자 김혜민'으로 나온 첫 번째 책은 그렇게 탄생했다.
공부에 도움이 될만한 자료를 몇 번이고 택배로 보내준 출판사 사장님 덕분에 나는 인생도 번역도 참으로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기회를 찾는 것만큼 중요한 것, 기회가 왔을 때 그걸 잡을 수 있는 실력이다.
실력은 언젠간 들통나게 되어있다.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꾸준히 실력을 끌어올릴 것, 그리고 나를 꾸준히 홍보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