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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 Dec 25. 2019

나에게 엄마라는 존재는

연말엔 더 많이 표현하자고요.

이 닦을 땐 열 번 세고 헹궈야 돼. 치약의 독한 성분이 입 안에 남아있거든. 그리고 옷을 왜 이렇게 꾸깃꾸깃 입고 다니는 거야? 엄마 젊었을 땐 얼마나 깔끔했는지 아니? 어휴. 밥은 제때제때 챙겨 먹어야지. 지금은 괜찮을지 몰라도 늙으면 다 티가 난다니깐.


듣기 싫은 잔소리가 이어지자 나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는다.



엄마! 나도 이제 서른세 살이라고.


듣기 싫다. 나도 알아서 다 할 줄 나이인데 아직도 여섯 살 조카 민서와 똑같은 취급을 받고 있는 거 같다.  그런 말을 하면 엄마는 "민서는 말이라도 잘 듣지"라는 말로 되받아친다. 나는 버럭 짜증을 내며 방 문을 닫는다.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왜 이렇게 잔소리를 하는지. 예전보다 더 심해졌어! 더!


그런데 방문이 닫히고 주변이 고요해지니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커진다. 사실 엄마 말 중에 틀린 말이 있었던가. 결국 다 나를 위한 말인데 그냥 끄덕이 얼마나 좋을까. 차로 서너 시간 떨어진 곳에 사는 내가, 자주 못 보니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었을 텐데. 나는 순간을 이기지 못했다. 이불 위로 미안한 마음이 뒤덮 숨이 막힌다.




한때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만약 부모님이 돌아가신다면." 나이가 들고 시간이 흐르면 죽음은 누구 피할 수 없다. 그건 나조차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아무래도 나보다 나이가 더 많으신 부모님의 죽음을, 언젠가 지켜봐야 할 확률이 크다.


 "엄마 없이 나는 어떻게 살지?"


나는 막막할 것만 같다. 그리고 너무 슬플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나는 여전히 이기적인 아이였다. 결국 나 자신을 더 걱정하는 거다. 엄마보다 엄마가 없는 내가 더 걱정인 거다. 그만큼 내가 의존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끝까지 나는 이기적인 딸이.


문을 열었다. "아까 짜증내서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이 뭐가 그렇게 자존심이 상다고 그 미안하다는 말을 못 했던 거지? 이렇게 곧바로 사과할 수 있기까지, 꼬박 30년이 걸렸다. 어렸을 땐 미안하면 미안하다, 고마우면 고맙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는데, 이제는 그게 어렵다. 그 마음을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길 바란다. 알겠지, 라는 생각으로 모든 걸 생략한다.


하는 짓은 조카 민서와 같으면서 표현하는 법은 민서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


울지 마. 엄마 마음이 아프잖아.
힘들지? 인생은 그렇게 어려운 거야.
그래도 우리 딸 힘내. 엄마가 항상 곁에 있을 거야.


취업이 힘들다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펑펑 울었던 적이 있다. 그렇게 울고 난 뒤 나는 다시 기분이 홀가분해졌다. 그때 문자가 왔다. 엄마의 문자.


나는 내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해 엄마의 마음을 찢어놓았던 거다. 나는 그렇게 이기적인 아이였다.



힘들면 그만둬.
정 일자리 구하기 힘들면 엄마가 먹여 살려줄게.
아르바이트하며 살아도 돼.


회사를 그만두기 전에도 엄마는 나를 걱정했다. 내가 퇴직 후 바로 번역일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부모님의 응원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르바이트를 해도 괜찮다는 말은 오히려 나를 일으켜 세워줬다. 무너져도 내 옆엔 늘 부모님이 있다는 생각이, 나를 일으켜 세워 한 번도 무너지지 않고 앞으로, 더 앞으로 갈 수 있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



어렸을 때 자꾸 나를 괴롭히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뒤에서 장난치고, 걸어가면 발을 걸고 참으로 귀찮게 굴었다. 어릴 땐 그게 애정표현의 하나일 수 있지만, 나는 그 아이가 귀찮고 싫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 아이는 나에게 관심이 없어졌다. 서운한 마음이 들 정도로 나에게 차가웠다. 괴롭힘은 거기서 끝이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시간이 흐르니 자연스럽게 멀어졌던 거다.


여기까지가 내가 알고 있던 스토리다. 그런데 내가 다 크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 사실 엄마가 학교를 찾아갔다는 것. 남자아이가 괴롭다는 말에 나 몰래 그 아이를 찾아가 또 혜민이 괴롭히면 교장 선생님에게 이를 테니 괴롭히지 말라고 타일렀다는 거다.


어쩐지. 갑자기 멀어졌다고 했어. 그 아이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어렸을 때 우리에겐 교장선생님은, 선생님보다도 더 큰 존재였는데. 나를 괴롭힌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왜 그렇게까지 했냐고 물으니 엄마는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그땐 엄마도 어렸잖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거야.

내 딸을 괴롭힌다는 말에, 다짜고짜 학교를 찾아갔는데..  방법을 몰라 그 아이를 찾아가 경고를 한 거지.

맞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었고, 엄마도 그땐 어렸다. 아마도 내 나이쯤, 아니 지금 나보다 몇 살 정도 더 많았던 나이였겠지.


KBS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용식이는 사람들이 자신을 끝까지 미워하지 않는다며 호탕하게 웃는다. 사실  엄마 곽덕순이가 항상 용식이 뒤에서 든든하게 지켜준 건지도 모르고.  그 장면이 나는 내내 기억에 남았다. 자식 일이라면 언제나 두 팔 벗고 나서는 곽덕순이가 우리 엄마 같아서. 엄마는 나에게 늘 그랬다.


괜히 든든한 존재. 모든 걸 다 해결해줄 것만 같은 그런 존재. 그냥 존재만으로 힘이 되고 든든한 존재. (그렇다고 막 엄마에게 이르지 않으니 걱정 마세요. ^^;)







눈이 드물게 내리 포항에 눈이 소복이 쌓였다. 나는 그때 부산에서 자취하고 있었는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이런 사진이 날아왔다.


손 끝이 시려도 나에게 힘을 줘야 한다는 생각에 손을 호호 불며 만든 눈사람과 나뭇가지로 적은 "김혜민 화이팅". 엄마, 아빠의 합작 선물.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나에게 이런 로맨틱한 선물을 보내는 부모님은 우리 엄마, 아빠뿐일 거야.



내 글에서 엄마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거다. 그러니깐요. 제말이요. 저도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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