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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봄단풍

당신의 이야기

by 봄단풍


그녀를 처음 만난 건 회식 때였다.


오후 아홉시, 잘 마시지도 못하는 소주를 억지로 대여섯 잔을 넘기고 겨우 정신을 붙잡고 있던 시간. 하필이면 다른 부서까지 함께하는 회식이라 팀장 간의 묘한 기싸움이 있는지, 함부로 먼저 나가기도 애매한 분위기였다. 대리 이하 직원들은 눈짓으로 서로를 위로하며 겨우겨우 자리를 버텨내던 그 시간.


“우수하.”

“예, 박 차장님.”

“이따가 홍보팀이랑 우리팀 다 같이 들어갈 만한 노래방 하나 찾아 놔.”

“예? 아,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적당히 빼, 인마. 홍보팀 신입보다 못 마시면 어떻게 해?”


툭. 감정이 절반 정도 실린 손찌검이 내 어깨로 내리쳐졌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위해 허허 웃었지만, 오늘도 가슴 한 구석이 그렇게 무너졌다. 세상에는 시간이 갈수록 무덤덤해지고 적응되는 일도 있지만, 방사능마냥 시간이 갈수록 축적되면서 참기 힘들어지는 일도 분명 있는 모양이었다.


“박 차장님~”

“어, 진주리 아냐?”


그리고 내가 박 차장으로부터 일곱번째 잔을 받을 무렵, 왁자지껄한 회식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 하얀 피부, 커다란 눈.


“우리 홍보팀에 새로 온 직원이 있어서 소개 좀 시켜드리려고요. 잠깐만 앉을게요.”


진 주임님은 그렇게 말하며 나와 박차장님 맞은편에 앉았다. 무늬 없는 하얀색 블라우스와 검은 바지를 입은, 단정한 차림의 진주리 주임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보였고, 그녀는 똑같이 고개를 꾸벅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길게 기른 검은색 머리카락이 허공에서 찰랑거렸다. 하지만 오락가락하는 정신은, 진 주임과 박 차장님이 몇 마디 더 인사를 나누는 동안 멍하니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래 그래. 일단 한 잔 받고. 너도 잔 비었지?"


몇 분이 지났는지, 몇 초가 지났는지. 느려진 정신임에도 손은 이미 빈 술잔을 들고 있었다. 곧 잔이 채워졌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은 저절로 술잔을 내 입가에 들이밀었다…….


그 때, 갑자기 차가운 손이 내 손 위에 얹혀졌다.


“우 주임님. 잠깐.”


그리고 그 시원한 감각은 곧 손을 타고 온 몸으로 퍼졌다. 짜증, 분노, 술기운, 온갖 부정적인 것으로 따뜻하게 달궈졌던 몸이 순식간에 차가워지면서 정신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몇 초가 지나고 나서야, 나는 그 시원한 손의 주인이 다름 아닌 진 주임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희 팀장님이 특별히 부탁하실 게 있다고 해서요. 잠깐 밖에서 보실래요?"

"네?"


나는 온 몸이 굳은 채, 내 손 위에 얹어진 하얀 손을 멍하니 쳐다만 봤다. 얼굴만큼이나 하얀 손은 곧 술잔을 잡은 내 손을 꾹 눌러 탁자 위에 내려놨다. 그리고 그 술잔만큼이나 차가운 손이 나를 이끌고 밖으로 나왔고 -


찰칵-


그렇게 나는 며칠 뒤, 홍보팀 주말 야유회의 사진 작가를 담당하게 됐다.


"우주임님!"


수없이 많은 인물 사진, 단체 사진. 심지어 이른 봄의 풍경도 하나의 사진기로 담아내느라 정신없는 나를 또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가 불렀다.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주말인데.”


진 주임님은 그렇게 내게 음료수를 건넸다. 카메라가 무겁지 않냐며 잠시 쉬라던 그녀는, 봄에도 단풍이 드는 것이 신기하다면서 새빨간 단풍을 향해 카메라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다들 휘날리는 꽃잎, 곳곳의 새싹, 따뜻한 바람과 함께 봄을 노래할 때 혼자 알게 모르게 물들어 있던 단풍이 있었다. 둘이 나눠 쓴 우산 아래 젖어든 어깨처럼, 언제인지도 모르게 마음 속 깊이 스며든 당신은 봄단풍을 닮았다고, 혼자 속삭이며 키득대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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