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처음으로 단 둘이 이야기 한 건 비 내리는 날이었다.
선잠에 들었다가 깬 아이처럼 잔뜩 찌푸린 채 아침을 맞이했던 하늘은,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흥건히 눈물을 쏟아냈다. 뻐근한 어깨를 누른 채 문 밖을 멍하니 쳐다보던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진작에 네가 올 줄은 알고 있었다고. 물론 아는 것과 실천하는 건 다르지.
“우주임님?”
“아, 진주임님. 안녕하세요.”
홍보팀의 진주리 주임님. 부서가 다르기도 하고, 나보다 나이도 경력도 위인 진 주임님을 내가 알고 있는 이유는 딱 두가지였다. 첫째, 신입사원 연수 때 인사를 나눠서. 둘째, 능력과 미모를 겸비한 사람으로 회사 내에서 매우 인망이 두터운 사람이라서.
“퇴근 안 하세요?”
“아, 해야 하는데......”
그녀는 눈을 동그란 눈으로 내 텅 빈 두 손을 잠깐 내려다보고는 다시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가세요?”
“네?”
“집에요. 어떻게 가시냐고요.”
“아, 버.... 버스타고 가요.”
곧 그녀는 다짜고짜 내 팔을 잡더니, 다른 한 손으로 작은 우산을 펼치면서 빗 속으로 발을 옮겼다.
“전 택시타거든요. 정류장까지 씌워드릴게요.”
“가, 감사합니다.”
우산은 작았다. 뺏어 들고 진 주임님 쪽으로 기울이려고 했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내 손을 밀어내고 직접 우산을 들었다. 자신이 아끼는 우산이라면서. 그렇게 버스 정류장까지 십 분 정도를 말없이 걸어간 그녀는 이내 곧바로 택시를 잡으며 우산을 내게 건넸다.
“전 집 앞에 내리면 되니까. 우산은 다음에 돌려주세요.”
“아뇨, 전 괜... 그, 감사합니다.”
나는 이미 홀딱 젖어버린 어깨를 쓰다듬으면서 황망히 멀어져가는 택시의 뒷 모습을 바라봤던 것이다. 그게 처음으로 대화를 나눴던 날.
그렇게 회사의 촉망받는 인재와 이야기를 나누는 날이 많아졌다. 먼저 우산을 돌려드리고, 보은하고자 잡았던 점심 약속이 저녁 약속이 되고, 들을 이야기가 많아 카페를 가고. 취미를 공유하다보니 둘 다 사진에 관심이 있다는 공통점을 찾게 된 이후, 나는 서서히 나 자신에 대해 경계하기 시작했다. 직장 선배, 회사 동료다. 정신 차려라, 일에 적응하기도 바쁜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고.
하지만 그 결심이 무너진 건 불과 며칠 뒤였다.
오후 아홉시, 잘 마시지도 못하는 소주를 억지로 대여섯 잔을 넘기고 겨우 정신을 붙잡고 있던 시간. 하필이면 다른 부서까지 함께하는 회식이라 함부로 먼저 나가기도 애매한 분위기였다. 과장 이하 직원들은 눈짓으로 서로를 위로하며 겨우겨우 자리를 버텨내던 그 시간.
“우수하.”
“예, 차장님.”
“적당히 빼, 인마. 홍보팀 신입보다 못 마시면 어떻게 해?”
툭. 감정이 절반 정도 실린 손찌검이 내 어깨로 내리쳐졌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위해 허허 웃었지만 오늘도 가슴 한 구석이 그렇게 무너졌다. 세상에는 시간이 갈수록 무덤덤해지고 적응되는 일도 있지만, 방사능마냥 시간이 갈수록 축적되면서 참기 힘들어지는 일도 분명 있는 모양이었다.
“박 차장님!”
그리고 내가 일곱번째 잔을 받을 무렵, 왁자지껄한 회식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홍보팀에 새로 온 직원이 있어서 소개 좀 시켜드리려고요. 잠깐만 앉을게요.”
진 주임님은 그렇게 말하며 나와 박차장님 맞은편에 앉았다. 무늬 없는 하얀색 블라우스와 검은 바지를 입은 단정한 차림으로.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보였고, 그녀는 똑같이 고개를 꾸벅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길게 기른 검은색 머리카락이 허공에서 찰랑거렸다.
"일단 한 잔 받고. 너도 잔 비었지?"
몇 분이 지났는지, 몇 초가 지났는지. 느려진 정신임에도 손은 이미 빈 술잔을 들고 있었다. 곧 잔이 채워졌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은 저절로 술잔을 내 입가에 들이밀었다…….
그 때, 갑자기 차가운 손이 내 손 위에 얹혀졌다.
“우 주임님. 잠깐.”
그리고 그 시원한 감각은 곧 손을 타고 온 몸으로 퍼졌다. 짜증, 분노, 술기운, 온갖 부정적인 것으로 따뜻하게 달궈졌던 몸이 순식간에 차가워지면서 정신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몇 초가 지나고 나서야, 나는 그 시원한 손의 주인이 다름 아닌 진 주임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희 팀장님께서 특별히 부탁하실 게 있다고 하셔서요. 잠깐 밖에서 보실래요?"
"네?"
나는 내 손 위에 얹어진 하얀 손을 멍하니 쳐다만 봤다. 얼굴만큼이나 하얀 손은 곧 술잔을 잡은 내 손을 꾹 눌러 탁자 위에 내려놨다. 그리고 그 술잔만큼이나 차가운 손이 나를 이끌고 밖으로 나왔고 -
찰칵-
그렇게 나는 오늘, 홍보팀 주말 야유회의 사진 작가를 담당하게 됐다.
"우주임님!"
수없이 많은 인물 사진, 단체 사진. 심지어 이른 봄의 풍경도 하나의 사진기로 담아내느라 정신없는 나를 또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가 불렀다.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주말인데.”
“아니에요, 제가 고맙죠. 주임님 덕에 수당도 더 챙기고.”
진 주임님은 내게 음료수를 건넸다. 사진기가 무겁지 않냐며 잠시 쉬라던 그녀는, 봄에도 단풍이 드는 것이 신기하다면서 새빨간 단풍을 향해 사진기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지그시 손가락에 힘을 줬다. 찰칵.
“오늘은 우산 챙겼죠?"
진주리씨는 쿡쿡거렸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그녀는 사진기를 내게 건네고는 금세 멀어져갔다.
다들 휘날리는 꽃잎, 곳곳의 새싹, 따뜻한 바람과 함께 봄을 노래할 때 혼자 알게 모르게 물들어 있던 단풍이 있었다. 둘이 나눠 쓴 우산 아래 젖어든 어깨처럼, 언제인지도 모르게 마음 속 깊이 스며든 당신은 봄단풍을 닮았다고, 혼자 속삭이며 키득대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