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지극히 평범한 날의 밤(2)

by 봄단풍

“아라야. 그.. 사실, 내가 이 능력을 갖게 된 다음 생각이 되게 많아졌어. 네가 말해준 대로 힘든 사람들도 돕고, 급박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도 살리고 하면서 느낀 게 많아.”

“근데?”

“그러다보니까, 그냥... 이제, 무슨 사고만 나도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그냥 내가 먼 발치에서라도 그 현장을 볼 수만 있었으면 저기에서 몇 명은 더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래서 그런지 그냥.. 전처럼 집중이 안 될 때는 가만히 있지를 못하겠어. 집에 혼자 찌그러져 있는 것보다는 돌아다니면 살릴 사람이 한 명이라도 많아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 때문에.”


찌그러졌던 아라의 이마가 살짝 펴졌다. 기회다.


“맨 처음 그렇게 사람들을 도우라고 말해준 건 너잖아. 나도 그 덕에 세상을 보는 눈이 많이 바뀐 것 같아. 알지, 그렇다고 해도 나는 내 삶을 열심히 살아야지. 그래도...... 너도 집중 안 될 때는 운동도 하고 바람도 쐬고 그러잖아?”

“그......”


아라는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대답했다.


“알았어. 그래도 여기 자소서는 꼭 내라?”


아라는 그렇게 말하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세일 그룹? 내일 마감이네. 야, 내가 여기 붙겠어?”

“붙으라고 쓰는 거 아니야. 공고가 떴으면 일단 쓰는 거야.”


아라가 건넨 세일그룹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었다. 7, 80년대 나라의 수출 주도 정책에 힘입어 성장한 기업으로, 근래에는 스마트폰을 비롯한 전자제품으로 세계에서도 1, 2위를 다투는 대기업 중의 대기업. 아라의 말대로 취준생이라면 일단은 공채에 전부 지원은 해보는 그런 회사였다. 전자는 물론이고 보험, 자동차, 증권에 최근에는 방위산업까지, 다루지 않는 영역이 없는 초거대기업이었으니까. 그만큼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자랑이 되는 곳.


“어차피 붙어도 시험도 봐야하고, 면접도 두 번이나 있고......”

“그건 자소서 붙은 다음 얘기지. 일단은 써, 무조건. 오늘 자정전까지 나한테 보내놔.”


아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기도 코트를 챙겼다. 고등학교 때부터 입었던, 떡볶이 단추가 주렁주렁 달린 남색 코트. 그러고보면 아라도 본인의 외모에 비해 참 수수하게 입는 편이었다. 나름 유복한 가정에 공부도 잘하고 인기도 많으니 이래저래 꾸밀만도 하고, 취업 준비할 정도가 됐으면 슬슬 명품에도 관심을 가질 법한데.


“같이 나가자.”


아라의 말에 나는 꽉 찬 쓰레기 봉투 하나를 챙겼다. 끼익거리는 철제 현관문을 넘어, 우리는 금방 11월 말의 차가운 도시 공기 속으로 발을 옮겼다.


“버스 탈 거야?”

“아니. 그냥 걸어갈래. 얼마 걸리지도 않는데 뭘.”


초등학교 시절 아라는 우리 옆집으로 이사를 왔었다. 그게 첫 만남이었지. 물론 수년 째 예정된 재개발을 진행하지 못하고 있는, 엘리베이터도 없는 단층 아파트에 아라네 가족이 오래 머물리는 없었다. 아라의 아버지는 공무원 중에서도 고위직이었고, 아라의 어머니는 대학 교수였다. 그들은 한 달 정도만 머물고 그 당시 신축 아파트로 금방 집을 옮겼지만, 아라는 그 이후로도 쭉 우리 집에 놀러와서 할머니와 나와 셋이 놀곤 했던 것이다.


“걸으면 그래도 한 십 분 걸리지 않냐?”

“천천히 걸으면 더. 야, 기왕 바람 쐬는 김에 나 집에 좀 데려다 주라.”

“어...... 그래.”


대답에 뜸을 들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남자친구가 뭐라고 안 해?”

“....”


아라는 대답 대신 코트를 여미면서 앞만 보고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렇게 한 오 분 정도, 집에 거의 도착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야.”

“왜.”

“아니, 저...... 아니다.”


아라는 그렇게 애매한 인사를 남기고 자신의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무슨 저택의 대문마냥, 단지로 들어가는 거대한 철문이 있는 큰 아파트였다.


“오늘 진짜 꼭 보내라? 자정 전까지다, 어?”

“알았어, 알았어.”

“지금 시간이 여덟시니까, 한 시간 바람 쐬도 세 시간은 쓸 수 있네.”

“아니 그래도 뭐 다녀와서 씻는 시간도 있고......”

“핑계 댈래 자꾸?”

“오키. 미안.”

“능력 쓰지마! 쓰더라도 들키지 마! 아니 그냥......”


최대한 쿨하게 손을 들어보이고, 나는 재빨리 뒤를 돌았다. 아라가 몇 마디 잔소리를 더 읊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대충 후드를 뒤집어쓰고 빠르게 발을 옮겼다.


서울의 밤은 밝다. 해가 진 것도 한참이 지났지만 곳곳에 켜진 불빛들 덕분에 오히려 낮보다도 따뜻한 느낌이다. 지나치는 차들의 충혈된 눈은 빨갛게 빛나고, 통창으로 환하게 불이 켜진 빌딩은 갑시탑마냥 골목 구석구석까지 내려다보고. 아침보다 진한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보도블럭은 색도 가지가지라 눈이 어지럽다.


밤 여덟시, 고속터미널을 지나 반포한강공원으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어차피 추운 날씨 때문에 한강으로 가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횡단보도에서 주위를 슬쩍 살피고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뒤, 나는 아직 빨간색인 신호등 뒤를 쳐다봤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가 떴다.

발 아래는 아까와 다른 평평한 아스팔트 바닥. 바로 옆에는, 방금 전 횡단보도 너머에 서 있던 빨간 신호등. 나는 정확히, 눈을 감기 전 쳐다봤던 자리에 서 있었다.


이게 내 능력이다. 눈을 감았다 뜨면, 감기 전에 바라봤던 곳으로 순간 이동을 하는 것.


방법도 간단했다. 가고싶은 곳을 쳐다보고, 눈을 감았다 뜨면 곧바로 그 장소에서 눈을 뜨게 된다. 아라는 현대 물리학을 거스르는 굉장한 능력이라고 했지만, 정작 내가 처음 능력을 얻게 된 뒤 했던 일은 지금처럼 사소한 것들이었다. 횡단보도를 신호 기다릴 필요없이 슥 건너거나, 걸어서 못가는 높은 곳에 올라가서 경치를 감상하거나.


그런데, 사실 거창한 뭔가를 하기에도 애매한 능력이긴 했다. 바로 그 초점을 맞춰야한다는 제약 때문에. 그건 생각보다 훨씬 번거로웠다. 예를 들면 보지 못하는 곳으로는 갈 수도 없고, 눈에 보여도 정확히 초점을 맞출 수 있을만큼 가깝지 않으면 갈 수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는 초점을 맞출 수가 없으니 공중이나 허공으로 이동할 수도 없었다. 가장 큰 제약은 유리창이나 안경을 통해서 본 곳으로도 공간이동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능력을 계속 쓰려면 어떻게든 시력을 잘 유지해야하는 셈이다.


공원으로 향하는 길은 한적했지만, 막상 한강 공원에는 사람이 듬성듬성 있었다. 이 추위에도 레깅스 차림으로 달리는 커플들, 자전거나 스케이드보드를 타고 묘기를 연습하는 사람들. 멀리 편의점에는 강자락 추위를 얕보고 산책을 나왔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서 라면을 끓이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빠른 걸음으로 반포대교 아래로 향했다. 밑에서 보니 거대하게 느껴지는 다리를 한 번 올려다보고, 양 손에 미리 가지고 나온 목장갑을 꼈다.


“후우.”


심호흡을 하고, 다리를 올려다본다. 이런저런 구조물 중 하나를 쳐다보고, 눈을 감았다 떴다.


덜컹 -


“흐읍!”


손에 잡히는 철골을 세게 붙잡고 곧바로 옆을 쳐다봤다. 두 발을 디딜만한 단단한 구석을 확인한 뒤 다시 눈을 깜빡. 순식간에 신발 밑창이 바스락거리며 콘크리트 바닥 위를 밟고 있었다. 좋아, 발만 디딜 수 있다면 그 다음부터는 쉬워진다. 나는 손을 툭툭 털고, 그렇게 몇 번 눈을 더 깜빡이면서 반포대교 아래를 통과했다.


이렇게 가다보면 가끔은 로드뷰를 가는 느낌이다. 눈을 뜨고, 갈 지점을 바라보고 감았다 뜨면 그 자리에서 보이는 풍경을 보게 되고. 걸으면서 풍경을 보는 게 아니라 가고 싶은 곳의 시점을 끊어서 보는 느낌. 하나 다른 것이 있다면, 손가락 클릭보다 눈을 깜빡이는 게 조금 더 빠르게 느껴진다는 정도.


반포대교를 건너는 건 몇 초로 충분했다. 그 다음은 다시 사람이 없을 때 슬쩍 인도로 올라와서 걷다가, 사람들이 안 볼 때 횡단보도를 슬쩍 건너고, 때로는 건물 위로 올라가서 옥상에서 옥상으로 순간이동을 하고. 나는 그렇게 목적지를 향해 거침없이 올라갔다.


이렇게 야밤에 산책을 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길을 걷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주위 풍경에 무관심하다는 것. 애초에 내 이동 능력이 눈을 깜빡이면 될 정도로 순식간에 일어나는 데다가 이동할 때 효과음이나 빛이 나지 않는 덕분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멀쩡히 다니는 길에서 능력을 써도 아직까지 한 번도 들킨 적은 없었다. 대부분 걸으면서도 핸드폰을 보기 때문이기도 하고, 설령 내가 사라지는 걸 봤다해도 잘못 본 것으로 여기기 마련이고, 나타나는 걸 봤다해도 잠깐 딴 생각을 했나보다 하지.


어두운 밤은 좀 더 낫다. 이 쪽 건물의 옥상에서 옥상으로, 창문이 없는 벽에서 또 벽으로 가다보면 사람의 시선 걱정할 것 없이 마음껏 능력을 쓸 수가 있다. 나는 그렇게 몇 분 만에 어느덧 남산공원으로 향하는 입구에 도착했다.


“.......”


이제 여기서부터가 문제다.

첫째로 길이 크고 넓게 뚫려있어서 내가 사라지는 모습과 다른 곳에서 나타나는 모습이 한 사람의 눈에 담기기가 쉽다. 둘째로, 시가지처럼 건물 위나 하다못해 다리처럼 밑으로 가고 싶어도 그럴만한 곳이 없다. 길 외의 곳은 전부 어두침침한 숲으로 막혀있으니까. 그렇다고 숲을 뚫고가자니 시야 확보가 안 되어 순간이동을 제대로 쓸 수도 없다. 결국에는 사람이 없을 때만 능력을 슬쩍 써야하는 건데......


“사람 오지게 많네.”


그랬다. 남산은 낮과 밤 할 것없이 항상 사람이 많았다. 가로등은 대체 몇 시까지 켜놓는 건지, 도대체 사람들은 언제까지 운동을 하는 건지, 아니 이 밤에 커플들은 왜 굳이 남산을 걷고 있는 건지......


‘할 수 없지, 뭐.’


결국 나는 묵묵히 발을 옮겼다. 유산소 운동이라고 생각하자. 그리고 상황을 봐서 틈틈이 능력을 써주면 그냥 걸어 올라가는 것보다는 빨리 올라가겠지.





“후우, 후우...”


난간에 걸터앉아 땀을 훔쳤다. 목적지까지 20분. 그냥 걸어올라오는 것보다 확실히 빨리 도달하긴 했지만, 그 잠깐 걷는 것만으로도 두꺼운 자켓 속은 땀으로 서서히 젖고 있었다.


“후우...”


땀이 식기는 멀었지만 자켓을 더 단단히 여몄다. 산 꼭대기에 세워진 빌딩, 그 빌딩의 옥상에 앉아있으면 응당 그래야하는 법이다. 땅 위에 있을 때보다 뚝 떨어진 기온과 차가운 바람은 이미 12월 말과 똑같았다.


서울의 야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남산 타워의 전망대. 그 지붕 위는 이 능력을 갖게 된 후 가장 자주 찾는 장소였다. 나 말고는 아무도 오지 않는 곳, 그러면서 내가 사는 곳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


구름 한 점 없이 탁 트인 하늘 아래 누운 도시. 짙은 남색 이불을 덮은 하늘 아래, 땅 위에 별들은 크고 작은 길 위를 열심히도 달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사무실에서 투덜거리면서, 누군가는 달리는 버스 안에서 꾸벅꾸벅 졸면서 저마다 하나의 별이 되는 시간. 어쩌면 지금은 남색 이불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하늘의 별보다 더 귀한 반짝거림.


가끔 잘 살고 있는 것인지 궁금할 때가 있다. 스물 다섯, 대학생으로서의 마지막 학기도 끝나가는 11월 말. 여태까지 쓴 취업 서류는 전부 탈락했고, 겨우 봤던 한 번의 면접도 마찬가지다. 초과학기를 다닐 여유는 없으니 졸업을 하긴 할텐데, 막상 졸업을 하고 갈 곳은 여태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시간은 하루 하루 속절없이 흘러가는데, 그렇다고 새로운 길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하필이면 바로 그런 때에, 이렇게 기적같은 초능력이 생겼단 말이지.


‘뭘 하고 살아야 하나......’


처음 능력을 갖게 됐을 때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혼자 이런저런 시도를 해봤다. 어디까지 갈 수 있나 실험도 해보고, 다른 사람 눈에 어떻게 보일지 혼자 촬영도 해보고. 그런데 정작 그 능력으로 뭘 할 수 있나 생각해보면 딱히 없었다. 고작해야 이렇게 사람들이 못 가는 곳에서 경치를 감상하는 정도.


[유튜버를 해볼까? 조회수 폭발하지 않을까?]


그런 물음에 아라는 가차없이 고개를 저었었다.


[누가 믿겠어? 그리고, 사람들이 믿으면 네가 안전하겠니?]


아라의 일갈에 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었다. 문제는 그 이후에 둘이 한참을 머리를 쥐어짜내도 답이 나오지 않았었지.


[지금 당장 떠오르는 게 없으면 억지로 쥐어짜낼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렇게 하릴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마침 창밖에 들려온 사이렌 소리. 아라의 눈이 번뜩였고, 나는 당황한 채로 아라에게 떠밀려 집을 나섰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지금의 구조 활동이다. 내 능력으로는 어렵지도 않았고, 생명을 구하게 되니 보람도 있었다. 문제는......


‘이걸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누가 돈을 주는 것도 아니니 직장을 갖게 되면 계속하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생계를 위해 후원을 받자니 내가 누군지 공개를 해야하고, 그렇게 되면 아라의 말대로 정부나 대기업에서 날 가만 둘리가 없을 터다.


‘근데 그게 더 좋은 거 아냐?’


그래도 먹고 사는 문제만 해결되면 끝이지. 아예 공무원이 되거나, 영화처럼 대기업 소속의 구조대가 되거나. 가능성은 많다. 돈도 많이 벌 수 있을 거다.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자니 벌써 저녁 여덟시 오십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나 남산 타워 아래쪽을 신중하게 살폈다. 사람은 거의 없었다. 딱 한 명, 긴 머리의 여자로 보이는 사람 뿐.


나는 전망대 아래쪽 난간으로 이동한 뒤 자세히 살폈다. 어째,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 쪽을 올려다보는 것 같기도 하고. 혹시나하는 마음에 나는 난간을 돌아서 반대쪽 숲으로 둘러싸인 텅 빈 공터를 내려다봤다. 옳지, 아무도 없었다. 한 번에 이동을 하기엔 아직 멀었던 터라, 나는 바로 아래쪽 손으로 잡을 수 있는 난간을 바라보고 눈을 깜빡였다. 순식간에 덜컹 소리와 함께 두 손과 발이 철로 된 얇은 난간에 매달려있었다.


“어?”


분명 아무도 없었던 그 터에는 아까 반대쪽에 서 있던 긴 머리의 여자가 서 있었다. 허리 위에서 끊기는 검은색 가죽 자켓 아래에는 하얀색 니트, 그리고 긴 다리가 도드라지는 스키니진에 군인이 신을 법한 튼튼한 검은색 워커까지. 야밤에 남산 꼭대기에 오를만한 복장은 아니었다.


곧 바람이 불고, 허리까지 닿을 법한 긴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가로등 아래 비치는 하얀 얼굴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그대로 똑바로 이 쪽을 올려다봤다.


“헉!”


마침 바로 옆에 송전탑으로 보이는 다른 탑이 있던 터라, 나는 재빨리 그 쪽을 보고 눈을 깜빡여 순간이동을 감행했다.


“......!”


이동하자마자 나는 곧바로 아까 내가 있던 곳을 살폈다. 긴 머리의 여인은 아직도 그 자리에서 내가 있던 남산 타워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날 본 건가?’


지나치는 사람에게 들킬 뻔한 적은 많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느낌이 달랐다. 괜히 식은땀이 나고, 보이지 않는 등 뒤에서 뭔가가 날아오는 것 같은 느낌......!


생각해보자. 여자는 처음에 남산타워에서 산책로로 향하는 길 쪽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를 피해서 반대쪽,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공터로 순간이동을 했는데, 눈 깜빡이는 그 찰나에 남산 타워 반대쪽에 와 있다고? 그리고 거기서 굳이 내가 있는 난간을 올려다본다고?


‘그냥 산책 나왔다가 쉬는 거겠지?’


하지만......

누가 워커를 신고, 스키니진에 가죽자켓을 입고 산책을 해?


‘잘못 본 걸 수도 있지.’


나는 계속 그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여자는 여전히 내가 있던 난간을 올려다보다가, 허리에 손을 짚고 주위를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찾는 거다. 아무리봐도 나를 찾는 폼이다!

나는 후다닥 송전탑에서 내려왔다. 높은 곳에 있어봤자 눈에 잘 보이기만 할 뿐이다. 나는 재빨리 가장 가까운 산책로로 순간이동을 하고,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마다 순간이동을 하면서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계속 뒤를 돌아봤지만, 다행히 이태원의 어느 건물 옥상으로 이동할 때까지도 여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 흥분이 가라앉기 시작하자마자 아라의 잔소리가 머릿속을 울리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너무 안일했다. 밤이라고 안 보이는 것도 아닌데 도심 한복판에서 순간이동이라니!


우우웅-


“헉! 여, 여보세요?”

[아직 밖이야?]


머릿속 잔소리가 현실이 될 참이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아라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말이 턱턱 막혔다.


“어, 어.. 어! 그 있잖아...”

[얼른 들어가라, 그러다 들킨다? 그리고 자소서 자정 전까지 보내는 거 잊지 말고.]

“어....어, 그래야지.”

[뭐, 있잖아 뭐? 무슨 말 하려고 했던 거 아니야?]

“.....”


굳이 쓸데없는 걱정거리를 안겨줄 필요는 없겠지.


“아냐 아냐. 야, 집에 간지 몇 분이나 됐다고 벌써 전화야?”

[한 시간 지났거든, 어? 얼른 들어가서 씻고 자소서나 써. 할머니 걱정하셔.]


전화는 그렇게 끊어졌다. 나는 혹시 눈에 띄일까, 아무도 없는 건물 옥상 난간 밑에 허리를 숙이고 잠시 숨을 고르다가 곧 겨우 몸을 들어 집까지 이동했다. 늘 가던 길을 피해서, 반포대교가 아닌 한남대교를 지나서, 평소에 지나지 않던 큰 건물들의 옥상과 창문 사이를 순간이동하면서 10분만에 집으로 들어왔다.


“저 왔어요.”


그 새 들어와 있던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나는 얼른 씻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어떻게든 집중해서 자소서를 쓰려고 했지만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 여자는 누굴까?

똑같은 순간이동 능력자인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왜 나에게만 능력이 있을 거라고 속단했던 걸까? 다른 사람에게도 능력이 있으리란 생각을 왜 여태 하지 못했을까?


“하......”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런 상황에서 어영부영 유튜버나 해볼까 망상을 품으면서, 한 밤에 남산타워 꼭대기에 올라가 승자의 기분을 만끽했던 내가 너무 멍청하게 느껴졌다. 아라의 말대로, 아니 아라의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내 미래를 생각해야 했다.


띠링.

메시지 알림. 멍하니 핸드폰을 쳐다봤다. 밤 열한시 일분.


[김아라님이 사진을 보냈습니다.]


얼른 손가락을 움직여 화면을 열었다. 에이포 용지 한 장 분량의 빼곡한 자기소개서 예문이 와 있었고, 곧 아라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이거 작년 합격 자소서래]

[막힌다 싶으면 일단 따라 써봐]


그래도 아라한테는 말을 해야하나......

한 손으로 턱을 괴고 한 손으로 머리를 싸맨 자세로 한참 핸드폰을 노려보다가, 나는 결국 [오오 감사]라는 짧은 답을 보내고는 다시 화면을 껐다.


오히려 아라에게 털어놓을까 고민을 할수록 오늘 생겨난 불안은 서서히 수그러들었다. 내가 잘못 본 걸 수도 있고, 아직 무슨 일이 생긴 것도 아니다. 아라 없이 나 혼자만의 감으로 도망쳤을 뿐인데 그 감은 보통 틀리기 마련이잖아?


‘갑자기 비참하네.’


그래도 마음을 가라앉힐만큼 합리화가 됐다면 그걸로 된 거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서 자소서에 집중했다. 나중에 뭘하든, 일단 완벽하게 정해진 게 아니면 능력을 숨기고 다니는 게 맞다. 지금은 그것만 생각하자, 당분간 능력은 쓰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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