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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단풍 Jun 15. 2022

2. 비오는 날

퇴고없이 쓰는 글


나의 아내께서는 비오는 날씨를 싫어한다.


우중충하고, 어둡고, 번개나 천둥이라도 치면 무섭기 짝이 없는 날씨라서. 나갈라치면 신발과 양말, 소중한 내 발까지 다 젖어버리고 옷도 마찬가지.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우산이 소용없어지고.


모름지기 하루의 시작은 따스한 햇살과 함께 해야 기분이 좋은 법인데, 자고 일어나서 눈을 떴는데 이게 밤인지 낮인지 구분도 가지 않으면 일어나기도 싫어지기도 한다.


오랜만에 둘이 함께하는 주말 아침, 비오는 날 내 팔베개를 베고 누운 아내는 그렇게 얘기했다. 하필 주말인데 비가 오냐며. 그래서 나는 이불을 덮어주면서 낄낄거렸다. 그래, 나도 비오는 날씨는 안 좋아한다고. 훈련소에서 사격 훈련이 있는 날 장대비가 내렸는데, 그래서 사격은 취소할 줄 알았는데 그 비가 다 통하는 칙칙한 우의를 입고 기어코 사격 훈련을 했었다고.


아내는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나는 그 박자에 맞춰 고개를 저으면서 최악이라는 말을 몇 번 반복했다.


그렇게 서로의 반응이 마무리 될 때쯤, 나는 슬쩍 침대방 창문을 열었다. 그렇게 창문을 열면, 처음에는 희미하게 들리던 빗소리가, 꼭 멀리 축구 경기장에서 들리는 환호성처럼 서서히 크게 들리기 시작한다. 여름인데도 시원한 공기가 발끝부터 스멀스멀 기어올라오기 시작하고, 흙냄새인지 물내음인지, 알 수 없는 묵직한 냄새가 스리슬쩍 코 아래에 자리잡는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면 나는 잔잔한 피아노 연주곡을 틀었다. 그 느낌있는 쇼팽이니 드뷔시니, 그런 이름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울할 때 듣는 피아노’라는 이름으로 검색해서 나오는 한 두시간짜리 연주곡. 물론 그걸 다 들을 생각은 없었다. 그냥 처음 몇 번 건반을 하나하나 소중하게 누르는 소리가 들린 다음에는, 슬쩍 아내를 쳐다보는 것이다.


“좋은데?”

“응.”


그게 비오는 주말 아침의 대화다. 몇 마디 말을 나누고, 감각을 모두 동원해서 비를 느끼고, 그리고는 서로 미소를 주고받는다. 


원래, 비가 오면 하늘을 쳐다볼 일이 없는 법이다. 우산으로 가리기도 하고, 천장이 막힌 곳으로 뛰어가기 바쁘기도 하니까. 그렇다고 고개를 치켜들면 그대로 비를 맞아버릴테니, 오히려 비가 오는데 하늘을 보면 바보 소리를 듣게 되는 법이다. 그리고 혹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비오는 하늘이 뭐 볼 게 있어?”


있더라. 있곤 하더라. 눈이 시릴 정도로 새파란 하늘도 없고, 뭉게뭉게 그 위에 누워있고 싶은 뽀얀 구름도 없고, 솜씨 좋은 재단사가 수를 놓은 듯 아름답게 이어진 금빛 하늘과 붉게 물든 노을도 없고, 그렇다고 새까만 이불 위에서 반짝이는 작은 별들도 없지만, 비 오는 하늘도 나름 운치가 있더라. 흐릿하고 칙칙할 줄 알았던, 먹구름만 꾸역꾸역 몰려든 그 회색 하늘이, 정작 슬쩍 올려다보면 점점 하얗게 보이곤 하더라. 비를 뿌리느라 인상을 잔뜩 구기고 있는 줄 알았던 그 하늘이, 정작 비를 무릎쓰고 쳐다보면 은근히 부드럽게 웃고 있는 듯한 느낌.


그리고 어김없이 귀와 코가 열린다. 비에 젖은 풀냄새, 흙냄새, 그리고 시원하게 빗줄기가 땅에 스며드는 쏴아- 하는 소리. 그러면 마음 속에서는 이미 누군가 피아노를 똥땅거리면서 운치를 만들고 있다. 정작 피아노를 칠 줄은 몰라도, 머릿속에서는 라흐마니노프 뺨치게 손가락을 놀릴 수 있거든.


그러고보니 나의 아내께서는 피아노를 전공하셨다. 그럼에도 그녀는, 비 오는 날이 아직은 무섭다고 한다.


“그러니까 비올 때는 어디 가지마.”

“같이 있을까?”

“응.”


나의 아내께서는 내 팔베개를 좋아한다. 비오는 날에는 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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