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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단풍 Jun 25. 2022

3. 벌써 5개월이다.

퇴고없이 쓰는 글


내 인생 첫 돌잔치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왜냐하면, 불과 몇 시간 전에 다녀왔으니까. 물론 내가 한 살 때 했던 돌잔치를 제외해야겠지만. 쉽게 말해서, 오늘 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돌잔치에 다녀왔다는 말이다. 원래 글이라는 건 별 것 아닌 것도 있어보이게 쓰는 것이기도 하니까. 암.


아무튼, 다른 사람의 아이가 청진기를 집어드는 것도 구경하고, 사진도 찍고, 그 아이가 사람들의 눈치를 보다가 울기도 웃기도 하면서 사랑스러움을 그 공간에 있던 모두에게 나눠주는 걸 지켜보는 건, 생각보다 훨씬 마음이 따뜻해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참으로 간사해서, 불행한 중에도 행복의 망상을 펼치는 것처럼, 행복한 중에도 미래의 두려움을 떠올리곤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래. 얼마 후 태어날 내 아이에 대한 걱정.


나는 대부분 걱정이 되는 일은 미리미리 준비를 해두는 편이다. 감사가 예정되어 있다면 그걸 안 시점부터 차근차근 자료를 정리해두길 좋아하고, 시험을 준비한다면 바로 진도를 나누어 공부 계획을 짜서 차근차근 준비하기를 선호하고. 결혼을 준비할 때도, 프로포즈에 성공한 바로 그 날부터 결혼식 사회 대본을 구상했던 것이다. 물론 보통은 예식장이나 스드메를 먼저 예약한다는 점에서 조금 포인트가 다를 수는 있지만.


아무튼, 아이에 대해서도 나보다 훨씬 더 준비성이 철저한 우리 내무부장관님 덕분에, 지금도 미리미리 아이를 맞이할 준비를 해두고 있는 중이다. 태아보험은 물론이요 아이가 지낼 공간을 고민하고, 물건들을 사거나 감사한 주위 분들로부터 받아두기도 하고.


그런데 도무지 준비가 안 되는 것이 있는데 바로 마음이다.


아이가 싫으냐, 하면 그건 아니다. 사실 지금 내 마음보다 먼저 걱정했던 건, 내가 설마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어서 아이를 봐도 아무 감흥이 없는 소시오패스나 싸이코패스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이었는데, 그 걱정은 초음파 사진을 보고 난 뒤로 말끔히 사라졌다.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 그 사람과의 사랑, 그리고 그 안에서 생겨난, 어떤 꼬물꼬물 움직이던 자그마한 것이 이제 심장을 쿵쿵 울려대면서 하나의 생명체로 자라나는 걸 본다는 건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경이,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이 준비가 안 된다는 것이 대체 무슨소리냐 하면, 바로 내 자신이다. 내가 정말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보통 글이라 하면 그래도 희망적이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결론을 내리고 끝을 내야하는데, 지금의 이 걱정은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이건 그 오래 전부터 늘상 세워야했던 사랑에 대한 가치관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내 자신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어야, 다른 사람과 나누는 사랑도 온전히 할 수 있다는 것. 아직도 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사랑할 수 없으니 이런 일에도 자신이 생기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참 사람의 기억력이라는 것은 당사자 본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행복했던 기억은 빨리도 흐려지는 것 같고, 불행했던 기억은 그보다 더 빨리 사라지긴 하는데, 문제는 내가 부끄럽고 창피했던 기억이다. 그런 기억은 도무지 그 때의 느낌이 흐려지질 않는다! 내가 왜 그랬고, 내가 왜 그런 말을 했고, 내가 왜 그런 행동들을 했는지 지금의 나로선 이해되지 않는 기억들. 그리고 그런 기억들이, 와이퍼가 금방 지나간 자동차 앞 유리처럼 너어어어어무도 선명하다.


사실을 말하자면, 결혼하기 전까지는 바로 그 부끄러운 기억들을 좋아했다. 왜냐하면 그 부끄러운 기억들이 선명하게 남아있어 준 덕분에, 항상 노력이라는 걸 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는 이런 건 하지 말아야지, 아, 이런적도 있었지, 참. 이런 것도 하지 말아야지. 아, 그건 절대 안 돼! 그렇게 하나 하나 챙기다 보니 적어도 남들 눈에 튀지 않는 정도로는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지.


어쩌면 내가 넘어야 하는 하나의 산인지도 모른다. 언제까지 그 부끄러운 기억들, 내가 못났던 순간들을 곁에 두면서도 미워하면서 살 수는 없으니까. 과거를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건, 그걸 거울 삼아 더 나은 삶을 산다는 것, 단순히 그런 것보다 더 높은 차원의 일인 것이다.


‘이런데도 날 사랑해?’


거울 속의 내가 그렇게 묻는 셈이다. 넌 그래도 나를 사랑 하겠냐고. 다른 사람에게는 언제든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너를 사랑하는 데에는 이유가 없다, 그렇게 당당하게 말했던 것을 내 자신에게도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 그런 적도 있었지. 근데 그것도 나야. 고생했다, 너는 그 때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야, 하고 토닥이면서 안아줄 수 있냐는 것이다.


결혼이 인생의 한 막을 건너 뛰는 것이고, 아이를 기르는 건 또 다른 차원의 문을 여는 것이라고들 하는데, 그건 이런 고민들을 뛰어 넘어야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결혼, 출산, 그 자체가 문이 아니라, 그 때 내 자신을 껴안고 포용할 수 있을 때에야, 나는 내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고, 사랑하고, 그렇게 내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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