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단풍 Sep 01. 2023

바보가 되었습니다.


요즘 바보라는 말을 들을 때가 많아졌습니다. 좋아했지만 실력은 제자리였던 온라인 게임도 끊었고,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며 시험을 보는 일도 없는데 그런 말을 듣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딸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결혼을 하거나 육아를 시작하면 집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기가 어려워지곤 합니다. 그러다보니 어쩌다가 사람을 만나면 근황을 나누게 되는 일이 많은데, 보통 딸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하면 듣게 되는 말이 그렇습니다. 너도 딸 바보냐, 나중에 딸에게 남자친구가 생기면 어떡할 것이냐, 통금은 몇 시로 할 것이냐 등등. 바보라는 단어 자체로는 썩 기분 좋은 말이 아닙니다만, 그 뒤에 이어지는 질문들에는 이상하리만치 웃으면서 대답할 수가 있습니다. 즐겁기도 하고, 오히려 그들에게 딸 사진을 보여주면서 자랑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에서야 깨닫습니다. 이래서 바보 소리를 듣는 구나, 하고.


아이에게는 되도록 많은 것들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느끼게 해주고 싶습니다. 사랑과 행복을 넘치도록 느끼게 해주고, 세상의 어려움도 보여주면서 이겨낼 용기와 힘도 심어주고 싶고, 그렇게 얻어낸 즐거움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법도 가르쳐주고, 다른 사람이 짊어졌던 짐을 나눠 드는 것도 가르쳐주고 싶습니다. 그 힘든 과정에서 새롭고 또 귀한 인연들도 만나게 해주며 세상 속에 담대히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잘 길러내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웃으면서 세상을 돌아보면 문득 두려워질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나 예쁘고 귀여운 아이를 내보낼만한 곳인지, 나조차도 헤매고 있는 이 곳에 딸이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지, 험한 곳에서도 버텨낼 수 있는 강인한 존재로 잘 길러낼 수 있을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하루하루 세상을 둘러보지만 딱히 뚜렷한 답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누군가의 잘못에 대한 날카로운 말들은 어렵지 않게 던져집니다. 저 넓은 세상 곳곳의 소식을 듣기 위해 찾아보던 뉴스를, 이제는 다들 욕하고 비난할 누군가를 찾기 위해 뒤져봅니다. 결과 없이 순수한 과정의 아름다움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한 자세가 되어버렸고, 어렸을 때부터 배워왔던 소중한 가치들은 어느새 고루함 그 자체가 되어버렸습니다. 어느샌가 어려운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도,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 되어버렸죠.


대가 없이 베푸는 선의, 다른 사람을 위한 양보, 그저 한 번 지나치는 이에 대한 배려, 베풀어진 호의에 대한 감사, 이들 중 하나라도 손에 잡히는 실익 없이 추구하는 사람은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바보. 그렇습니다, 지난 오랜 시간동안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배워왔던 아름다운 가치를 논하는 것은, 어느새 바보로 불리는 지름길이 되었습니다.


꿈은 꿈이요, 이상은 이상, 어두운 세상에서 길을 찾기 위해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그저 뜬구름잡는 일이라 합니다. 당장 눈 앞에 거대한 파도가 일렁이는데 닿지도 못할 별을 보며 길을 찾는 것은 요즘 세상에서는 바보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로부터 사막에서든 바다 위에서든 길을 찾기 위해 별을 바라봤던 이유는 그것이 항상 같은 자리에서 빛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별을 보고 길을 찾는 것은 별을 향해 가기 위함이 아니라, 별을 통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함입니다. 눈 앞의 언덕을 기준으로 삼아서는 같은 곳을 헤맬 뿐이며, 일렁이는 파도만 피하며 나아가다보면 같은 자리로 돌아올 따름입니다.


세상에는 분명히 그 별처럼 변치 않는 가치가 있습니다. 혹자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며, 혹자는 우정이라고 부릅니다. 누군가에게는 존중과 배려, 누군가에게는 감사와 사랑.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몇 배로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은 세상에 분명 존재하며, 그저 어두운 밤 공기에 가려져있을 뿐이라고 믿습니다. 봄의 새싹과 여름의 찬란함, 가을의 단풍과 겨울의 흰 눈, 세상 그 어떤 아름다움도 밤에는 볼 수 없는 법이지만, 그저 가로등 하나 정도의 작은 불빛만으로도 그 아름다움은 다시금 눈을 가득 채우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분명 우리를 지금보다 더 나은 곳으로 인도하리라 믿습니다. 별을 보고 길을 찾는 사람에게 왜 가지도 못할 별을 보고 길을 찾냐 꾸짖는 것이 어리석인 일이듯, 그 아름다운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바보라 하는 것 역시 언젠가는 어리석인 행동이 되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바보가 되어보려고 합니다. 딸 바보이고, 그녀가 살아갈 세상을 바보처럼 살아가는 아빠가 되어보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 아직 지켜져야 하는 아름다운 가치가 있다고 믿으며 그걸 우리 딸에게도 알려주고 싶어하는 바보가 되어보렵니다. 그래서 이런 바보도 육아를 한다고 여기저기 알리고 싶은 마음에 이 글을 쓰게 됐습니다. 이런 바보도 육아를 하는데 나름 재밌어 보이지 않는지, 그러니 같이 바보가 되어보는 건 어떠신지, 넌지시 제안을 드리면서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