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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단풍 May 16. 2024

답보

A씨 이야기

회사는 A씨의 생각이 깔끔하게 정리되는 것을 기다리지 않았다. 몇 주 뒤, 이번에는 직원들 사이에 새로운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야, 올해 채용 공고 봤냐?”

“‘전환’ 내용 사라지고 초봉이 올랐어. 삼천오백만 원.”

“뭐야? 그러면 우리만 새된 거야?”     


소문은 금세 퍼져 A씨의 귀에도 들어왔다. 회사 내부적으로 법적인 검토를 해보니 전환을 빌미로 채용을 하는 것이 법적인 부분에서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해 채용 방식을 바꿨다는 것이다. 하지만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바꿀 때 대대적으로 공고했던 것과 달리 회사는 이러한 내용을 단 한 번도 공개적으로 안내하지 않았다.     


“아니, 우리는 아직도 연봉이 이천만 원 중반인데, 신입은 삼천오백만 원을 받는 게 말이 되냐고?”     


회사의 새로운 공개 채용 공고와 함께 A씨의 사내 메신저는 바빠졌다. 회사가 직원들에게 말도 없이 내부적으로 법리 검토를 했다는 것, 그리고 검토 결과를 바탕으로 스리슬쩍 채용 방식을 바꿨다는 것, 그리고 나중에 채용하는 직원들에게 더 많은 연봉을 준다는 것. 그 소문들이 A씨와 동기들로 하여금 노동조합의 문을 두드리게 만들었다.     


“저희도 따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신입 직원의 연봉을 깎을 수는 없잖아요? 회사는 오히려 처우를 개선해 준 것인데 왜 그러냐는 거예요. 후배들이 돈 많이 받는 것이 배가 아프냐는 건데.”

“아니, 그걸 반박을 못해요? 배가 아픈 건 당연하죠! 같은 일 하는데 저희는 그런 식으로 뽑아놓고 그냥 그러려니 할 줄 알았어요?”     


동기들과 함께 찾아간 A씨는 일단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노동조합에게도 마땅한 대안은 없었다. 법리 검토를 했다는 것도 소문에 불과했고, 정작 노동조합에서 다른 법무법인에 지금의 전환과 관련된 검토를 요청했을 때는 문제가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는 것이다.     


“일단 법적으로 이길 수는 없어요. 재판 자체의 승산도 문제고, 재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우리에게 불리하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희가 생각하고 있는 건 전환 됐을 때 조건을 더 좋게 하자는 겁니다. 이번에 전환되신 분들은 연봉이 삼백만 원 정도 오르고, 수당도 더 올랐습니다. 다만 회사도 지금 사정이 좋지 않다는 건 생각하셔야 합니다.”     


결국 노동조합의 말은 일단 전환 시험에 합격하라는 것이었다. 전환이 될 때의 처우를 확실하게 개선할 테니 시험에 합격부터 하고 이야기하자는 것이 그들의 요지였다.     


“아니, 부위원장님. 들어보세요. 시험을 통해서 전환이 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잖아요? 처음에는 결격 사유만 없으면 다 전환시켜준다면서요. 그러니까 시험을 없애자는 겁니다. 애초에 누가 출제했는지도 모르고, 누가 채점했는지도 모르고, 누가 몇 점을 받았는지도 모르는 시험으로 평가를 한다는 것이 말이 되나요?”

“자, 시험을 없애자, 좋습니다. 그런데 시험을 없애면 전환도 없어지는데 그건 괜찮으시겠어요? 연봉도 안 오를 테고 처우도 지금 그대로일 텐데?”     


회사만큼이나 노동조합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시험에 대해서도, 전환에 대해서도 노동조합과 A씨 동기들의 입장은 첨예하게 달랐던 것이다. A씨와 동기들은 한숨을 쉬면서 노동조합 사무실의 문을 나섰다.      


“아니 시험을 없애달라니까 무슨 시험을 합격하라고 그래? 조건 없이 전환을 시켜달랬지 누가 전환 자체를 없애달래?”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척을 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로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야?”

“다 똑같다니까. 노동조합이나 회사나 한 편이라고. 애초에 믿는 게 아니었어.”     


A씨는 오랜만에 만난 동기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다음 방안을 생각해 봤지만 마땅한 방안이 없었다. 회사의 선배들과 이야기를 해 볼 것인가? 그들은 A씨보다 더 많은 노동조합 위원장들을 만났고, 그중에는 노동조합으로 일했던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A씨와 동기들은 그것이 의미 없는 일이라는 두 가지 이유를 찾아냈다. 첫 번째, 결국 그 경험 많은 선배들 중 선출된 것이 지금의 노동조합이다. 더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두 번째, 그들은 ‘전환’이라는 어려움을 겪는 현세대에 별 관심이 없다. 이미 입사한 시점보다 은퇴 시점이 가까워진 그들 입장에서는 회사에 고분고분하게 일하면서 마지막까지 퇴직금을 타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행복한 길인 것이다. 굳이 몇 년, 십수 년까지 차이 나는 후배들을 위해 자신의 노후 계획을 걸고 함께 맞서 싸울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외부에 협조를 요청해 보면 어떨까? 기만에 가까운 행위에 대해 언론을 통해 세상에 퍼뜨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바깥에 알려지는 즉시 회사와의 법적인 분쟁을 피할 수 없을뿐더러, 취직 자체가 어려운 현시점에서 이런 식의 고발이 어떤 여론을 형성할지 미지수였다. 극단적으로, ‘누가 그 회사 가라고 협박이라도 했냐’는 따가운 비판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회사가 미끼를 잘 던졌고, 우리가 멍청해서 덥석 문 거지.”     


결국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한 A씨와 동기들은 누군가 던진 마지막 말에 한숨을 쉬며 집으로 향했다. A씨는 그저 ‘전환 기회 부여’라는 애매모호만 글자와 회사의 이름값만 믿고 지원했던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날 뿐이었다. 자꾸만 괜찮다고, 자신이 일하면 된다고 말하던 그의 아내는 그의 상상 속에서 점점 표정이 굳어갔고, 이제 곧 세상의 빛을 보게 될 그의 자녀는 그의 상상 속에서 가난한 아빠가 싫다며 떼를 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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