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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단풍 May 14. 2024

공고

A씨 이야기

간담회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 홈페이지에 갑자기 중대한 공고가 실렸다. 바로 그동안 근무했던 비정규직, 소위 무기계약직의 처우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정규 직원의 업무를 보조하기 위해 각 부서의 필요에 따라 채용하는 계약직원들이 있는데, 계약 기간을 계속 연장하면서 오랜 기간 근무한 비정규직원들을 바로 무기계약직이라고 칭해왔었다. 공고는 바로 그 무기계약직에 대한 처우가 바뀔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대략적인 내용은 이랬다. 비정규직을 없애라는 정부 지침에 따라 무기계약직원들을 전부 정규 직원으로 합친다는 것이었다. 사실 쉽지 않은 이야기였다. 일단 채용 방식이 달라 정규 직원과 동일선상에 놓기에는 공정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또한 한 부서에서 특정 업무만 담당하다 보니 연차가 많이 쌓였다고는 해도 정규직과는 갖고 있는 역량이 달랐던 것이다. 즉 채용 방식의 차이와 해왔던 업무의 수준에 있어서 정규 직원과 동등하게 비교할 수는 없는 위치에 있었다.     


회사는 이 문제를 간단하게 처리했다. 정규 직원으로 바뀌는 무기계약직의 경우, 연차에 상관없이 가장 아래 직급으로 흡수한 것이다. 즉 기존 무기계약직원들은 연차와 관계없이 공개 채용으로 입사한 신입사원이 되는 것이다. 어차피 전반적인 처우가 개선되는 것이고, 무엇보다 정년을 보장받는 것이므로 대다수의 무기계약직원은 큰 불만 없이 이를 받아들였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이렇게 정규직원이 된 무기계약직원 모두 ‘전환’ 기회를 부여받게 될 것입니다.”     


회사에 재직 중인 무기계약직에게는 좋은 기회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A씨를 비롯한 공채 합격자들은 달랐다. 가뜩이나 전환 대상자도 반으로 줄어버렸는데, 이제 계약직원과도 시험을 통해 경쟁해야 하는 입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경쟁자가 두 배 이상 늘어난 셈이다. A씨는 분노했다. 하지만 함부로 표현할 수 없었다. 여기에 반대하면 계약직원의 처우 개선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 분명했다.  

   

“아니, 이게 말이 돼?”     


오랜만에 모인 동기 모임에서 결국 누군가 분통을 터뜨렸다.      


“회사가 머리를 쓴 거야. 우리끼리 싸우게 만든 거라니까?”

“그래도 우리 먼저 전환시켜주겠지. 자, 봐. 우리끼리 경쟁하면 우리 중에 35%만 전환이 돼. 그런데 계약직들이 들어온다? 그러면 그중에 35%니까 우리 전부 다 전환될 수도 있는 거잖아.”

“너무 낙관적인 거 아냐? 그리고 그렇게 되면 계약직원들이 가만히 있겠어?”     


오랜만에 다 같이 모인 반가운 자리도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A씨와 동기들도 내년에는 전환 시험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결국 ‘전환’에 대한 얘기로 돌아왔지만, 아무리 이야기를 나눠도 마땅히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평소에 찾지도 않던 노동조합이 뭔가 역할을 해주길 기대할 뿐이었다.     


과연 새로운 노동조합은 이전과 달랐다. 회사의 공고가 난 지 며칠 만에 전 직원 간담회를 예고한 것이다. 전환 대상이 되는 입사 3년 이내의 직원들, 그리고 이번에 정규직으로 바뀌면서 역시나 전환 시험을 치를 수 있게 된 비정규직원들까지. 직원들끼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방향을 결정하자는 좋은 취지의 자리였으나, 아쉽게도 그 시간은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버렸다.     


“저희는 공채로 전환을 약속받고 들어온 거잖아요. 솔직히 무기계약직분들은 저희랑 전혀 다른 공고를 보고 들어온 건데, 정규 직원이 되는 것도 충분한 혜택 아닌가요? 굳이 전환까지 되실 필요는 없죠.”

“그러면 저희는 회사에 아무런 기여를 안 했습니까? 공채로 들어온 분들보다 저희가 근무 경력도 길고 하는 업무도 전문적입니다. 나라에서 비정규직을 없애라고 해서 회사가 그렇게 해주겠다는데 저희가 뭘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막말로, 공채로 들어오신 분들도 ‘전환’이 아니라 ‘전환 기회’를 약속받고 들어오신 거잖습니까? 똑같이 경쟁하는 것이 맞죠.”     


그 딱 한 번의 대화로 계약직과 공채 합격자들 간의 대화는 끊겼다. 그 이후에는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사람들끼리도 쉽게 입을 열지 않았고 대부분의 업무는 이메일이나 메신저 등의 비대면 채널을 통해 진행됐다. 회사에서 이것을 노린 것이 분명하다는 소수의 외침이 있었지만, 해결책 없는 지적은 결국 한 두 번의 메아리로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시간은 흘러갔다. 직원들의 지적과 외침은 한 달 만에 사그라들었다. 막상 전환 시험이 다가오자 회사에 변화를 요청하기보다는 일단 전환부터 되고 보자는 입장이 된 것이다. 첫 전환 시험 당일, 대상자들이 모인 것을 기회로 다시 한번 세력을 규합해 보자는 직원들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시험을 눈앞에 둔 직원들에게는 회사에 맞서기 위해 머리를 맞댈만한 여유가 없었다. 시험을 마치고 나서도 기도하는 심정으로 각자의 부서로 돌아갔을 뿐, 함께 싸우자고 모인 사람들은 열 명도 채 되지 않았다. 결국 또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정기 인사이동 발표와 함께 ‘전환’에 성공한 직원들의 명단이 발표됐다. 누가 얼마나 좋은 평가를 받았는지, 시험은 누가 채점했는지도 몰랐지만 누군가는 전환이 되고 누군가는 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전환이 된 자들과 전환에 실패한 자들이 나뉘기 시작했다. 그저 한쪽은 안도의 한숨을, 다른 한쪽은 이유도 알 수 없는 탈락에 이를 갈 뿐이었다.     


“어쩜 너네는 그렇게 멍청하니?”     


근무 시간 중 담소를 나누는 것을 즐기던 A씨의 새로운 부서장은 전환 시험에 대해 이것저것 캐묻더니 갑자기 그런 말을 뱉어냈다. 다른 팀원과 A씨는 갑작스러운 일갈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부서장을 살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아니, 뭘 고민하고 있어? 회사가 답을 딱 내려줬네. 왜 그렇게 멍청하니, 정말. 너네, 좀 어린? 젊은? 사람들은 꼭 그러더라?”     


부서장은 여유만만한 표정이었다. 아무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에 대한 답을 혼자 알게 된 것처럼 으스대고 있었다.     


“회사에 얘기해, 공개 채용으로 된 사람들만 전환해 달라고. 그럼 되잖아?”

“그렇다고 계약직원들을 무시할 수는 없잖아요?”

“야, 걔네는 솔직히 정규직 된 것만으로도 받을 만큼 받은 것 아냐? 그런데 전환까지 시켜준다고? 일단 전환을 담보로 회사에 들어온 사람들을 먼저 해줘야지. 안 그래?”

“그럼 그걸 회사가 알아서 해줘야죠, 저희가 어떻게 먼저 얘기를 꺼내요. 계약직이랑 싸우자는 것밖에 안 되는데.”

“그러니까 멍청하다는 거야. 걔네 의견이 뭐가 중요하니? 인사팀이든 노조든 가서 얘기하면 되지.”

     

그녀는 답답하다는 듯 얘기하고 팀원들을 살폈다. 하지만 그들의 감정이나 분위기를 살피기보다는, 왜 나를 알아주지 않느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팀원들은 A씨와 부서장을 번갈아 쳐다보며 분위기를 살폈다. A씨는 팀 내에서 유일한 전환 시험 대상자였던 것이다. 물론 A씨도 굳이 끝까지 토론할 생각은 없었기에, 그렇군요 하며 넘기고 말았다. 하지만 A씨는 집에 돌아와서도 곰곰이 생각했다. 정말로 우리가 멍청한 것인가? 그냥 단순히 회사에 그렇게 요청을 하면 될 일인가?      


“아서요, 어떤 식으로 말하든 결국 소문이 날 거야. 그리고 회사가 알아서 해주지 않을까? 급하게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만드느라 전환 대상이 된 사람들보다는, 전환을 약속하고 채용한 사람들이 먼저잖아.”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그냥 내 잘못인가 싶기도 하고.”     


A씨는 이제 만삭이 된 아내의 배를 쳐다보며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내의 배가 불러올수록 그가 느끼는 행복감도 커졌지만, 마음을 짓누르는 짐도 함께 커지고 있었다. 차라리 다른 회사를 지원했더라면 어땠을까? 구직 기간이 조금 더 오래 걸렸더라도 이런 걱정을 할 필요 없는 다른 회사에 입사했더라면 지금보다 괜찮았을까?     


“이리 와.”     


아내는 A씨의 어깨를 한 손으로 잡아당겼다. 그리고 눈을 감고 이마를 맞대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A씨 역시 아내와 이마를 맞댄 채 눈을 감고 가만히 그녀의 숨소리를 듣고 있었다.     


“다 잘될 거야. 대신 너무 튀는 행동은 하지 않기. 설마 전환이 계속 밀리기야 하겠어? 나도 일하면 되니까 걱정 마요.”     


A씨는 다시금 심장 박동이 느려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평소와는 달리 이번에는 마음의 짐이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내가 일을 하면 된다는 말은 그의 짐을 더더욱 무겁게 만드는 것이었다. 꼭 바다 아래에 커다란 배가 가라앉는 것처럼 천천히, 더 묵직한 짐이 가슴속에 얹히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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