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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단풍 May 25. 2024

전환

A씨 이야기

그해 겨울은 유독 빨리 찾아왔다. 나무가 옷을 다 벗기도 전에 창문에 서리가 끼기 시작했고, 도로에 뿌려진 물이 얼어서 자동차나 사람이 미끄러지는 사고도 종종 뉴스에 보도됐다. 지구 온난화와 더 낮아진 겨울 기온의 연관성을 분석하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A씨가 느끼는 회사의 분위기와도 비슷했다.      


전환 시험을 치르고 삼 개월이 지난 뒤 회사의 정기 인사 공고가 조직 내 전산망을 통해 뿌려졌다. 부서를 옮기는 사람, 신입 직원과 퇴직자의 명단이 실려있었지만 대부분의 직원들은 ‘승진’ 항목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전환 시험과 인사평가를 통해 ‘전환’이 된 사람들은 모두 승진자 명단에 올랐던 것이다. A씨와 동기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시험을 응시했지만, 모두가 합격하지는 못했다. 정규직원 중 몇 명이 전환되었는지, 계약직원 중에는 또 몇 명이 전환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A씨와 동기들은 반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A씨는 합격자에 속했다.     


“다들 축하해. 너무 신경 쓰지 말자고.”

“에라이, 이런 쓰레기 같은 회사. 잊어버리자고, 다들.”     


인사 발령이 난 직후까지도 A씨와 동기들은 끈끈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합격자와 불합격자 간의 대화는 점점 잦아들기 시작했고, 모임도 마찬가지였다. 점심시간이나 퇴근 후에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누군가에겐 공감하고, 누군가에게는 분개했던 그 시간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런 상황을 이미 예전부터 다들 예견했었지만 막상 반으로 나뉜 현실 앞에서는 모두가 무력했다.     


“들었어? 새해에 이사진 간담회를 하겠대.”

“이사진 간담회?”

“응. 이번에 사내이사 몇 명 바뀌었잖아. 그래서 회사 차도 새로 샀다던데 못 들었어?”     


어느새 코트가 자연스러워진 11월의 어느 날, A씨는 노동조합 실행 위원으로 일하던 동기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여전히 그녀는 피곤해 보였지만 표정은 한결 나아져 있었다. 그녀도 전환 시험에서 합격한 것이다.     


“차를 새로 사?”

“응. 정확히 말하면 차‘들’을 새로 샀지. 신임 이사진들 굴릴 차량 말이야. 돈 없다더니 그런 곳에는 또 야무지게 투자하지 않겠어? 아무튼, 새로 부임한 이사들이 과장 아래 직급들이랑 얘기를 하겠다네.”

“이상하네. 어차피 욕만 먹을 텐데 왜 그걸 굳이 하려고 하는 거지?”

“설마 이사님들한테 직접 욕하는 사람이 있겠어? 처음으로 높은 자리 앉았으니 우리 같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고 싶어서 시간을 잡았겠지. 그것도 아니면 얼마 전에 임단협 체결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우리야 모르지.”

“그럼 노동조합에서도 오겠네?”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A씨는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합격 발표가 난 이후에 계속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연봉도 오를 예정이고 큰 짐도 덜었지만, 꼭 주머니에 보관하던 쓰레기가 길에 떨어진 것을 느꼈으면서도 모른 척하는 것 같은, 그런 막연한 죄책감이었다.   

  

“나는 노동조합 탈퇴하려고.”     


커피를 홀짝이던 A씨의 동기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A씨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던 종이컵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녀의 말은 단순히 실행 위원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 자체를 나가겠다는 말이었다.     


“할 수 있는 게 없더라.”     


그녀의 말에 A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노동조합들도 결국에는 A씨보다 먼저 입사한 선배들이었다. 즉, A씨와 동기들, 후배들을 기만하는 회사의 방침에 동의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은 사람들인 셈이다. 그런 사람들이 A씨의 권리를 위해 싸워줄 리가 만무했다. 그다음 동기와 A씨가 나눴던 이야기는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두 번째 직장이나 아르바이트를 알아봐야 하나, 아니면 아예 이직을 해야 하나 등등. 실천 의지 없는 차선책을 나열하면서 한숨을 번갈아 쉬다가 결국 둘은 각자의 사무실로 흩어졌다.     


A씨에게도 고민이 생겼다. 바로 노동조합을 탈퇴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는 생각이었다. 지금도 매달 급여에서 이만 원에 달하는 노동조합 회비가 공제되고 있었는데, 그만한 돈을 투자할만한 일인 것인지 돌이켜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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