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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컬레이터 요정

by 봄단풍

"안 예쁘다니까! 내 스타일 아냐."


에스컬레이터 난간을 잡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바로 앞에서 높은 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줄짜리 좁은 에스컬레이터에 나란히 선 남녀의 대화는 그 한 마디로도 충분히 그 내용의 유추가 가능했다. 버럭하긴 했지만 남자의 몸은 여인 쪽으로 한껏 기운 채 쩔쩔매고 있었다.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어디서 본 듯한 여인의 얼굴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화장품 광고인 듯 했다. 꽤나 예뻤다. 앞의 두 사람을 가르고 지나갈까 고민하던 나는 그냥 그 자리에 서서 가기로 마음을 고쳐먹은 채, 그 얼굴을 다시 한 번 찬찬히 훑었다.


"진짜라니까! 네가 훨씬 더 예뻐."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귀를 두드렸지만 이내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작아졌다기보다는 내 관심에서 멀어진 탓이리라. 나는 멍하니 광고판의 얼굴을 훑었다. 그렇게 크게 확대를 했는데도 얼굴에는 잡티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잘 자란 명란처럼 도톰하고, 붉게 앙다문 입술. 그리고 에스컬레이터를 따라 점점 내려가는데도, 그 나를 놓치지않는 저 커다란 두 눈.


신기했다. 어렸을 때부터, 텔레비전이나 지하철 광고에 사람 얼굴이 나오면 늘 움직이며 나를 따라오는지 시험하곤 했다. 결과는 매번 같았지만 언젠가는 달라질 것이라 생각하면서. 어렸을 때는 그런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분명 타이밍을 비롯한 일정한 조건을 충족한다면, 세상이 모르는 비밀의 세계로 가는 문을 열 수 있으리라는 강박. 보도블럭에 딱 맞춰 걸음을 옮기거나 훌라후프를 바닥에 내려놓고 한 가운데에 점프를 시도하거나 하는 행동들이 그러했다.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에스컬레이터에도 그런 행동이 있었나? 문득 떠올린 생각에 돌아온 기억은, 처음 에스컬레이터가 무서워서 발을 떼지 못하던 나였다. 그 시절의 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지는 못했지만 내리는 건 잘했다.


어른이 된 지금도 비슷한 것 같다.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는 건 너무나 어렵고 또 두려운 일이지만, 내 앞에 닥쳐올 위험을 피하거나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건 참 열심히도 한다. 소득, 직장, 미래, 글, 운동, 사람, 관계…….


입가에 걸린 미소가 사라질 때쯤,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바로 앞의 얼굴이 갑작스레 미소를 지은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하지만, 이마부터 턱까지의 길이가 내 키의 서너 배는 족히 웃도는 크기의 얼굴일진대 미소를 지었다면 눈에 보이지 않았을리가 없었다. 그런데 왜 나는 그런 느낌을 받은 걸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정말 이상한 게 무엇인지 나는 깨달았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천천히 내려간다 한들 그렇게 오랫동안 보고 있을 얼굴이 아니었다. 아무리 에스컬레이터가 길어도 지금쯤은 분명 바닥을 보여야하는데, 그리고 이 얼굴은 내 시야에서 사라졌어야 했는데 여태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에스컬레이터는 멈춰져 있었다. 황급히 주위를 살피는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여인을 달래려고 얼굴에 애교를 한 가득 머금은 남자의 얼굴이었다. 다소 부담스러운 얼굴이 멈춰져있으니 더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여인은 뒤통수만 내게 보이고 있었지만 부디 그 얼굴에는 차마 참지못한 미소가 새어나오고 있길 기도하며 나는 멈춰져있는 다른 사람들을 훑었다.


"야!"


고개를 돌렸다. 벽의 얼굴은 여전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확히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야."


전보다 온화해진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입술 사이로 이가 살짝 드러난 얼굴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벽에 인화된 얼굴이라서가 아니라, 그녀의 두 눈은 정말로 나를 살짝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는 어때?"

"네?"

"너도 내가 별로야?"


이상했다. 그 상황에서도 별 시덥잖은 말들이 떠올랐다. 그제서야 생각난 얼굴의 주인공이 아이돌이었다는 사실도 생각났고, 최근에 새로운 앨범을 발표했다는 것도 생각이 났다. 곡은 잘 되냐고 묻고도 싶었고 벽에 걸려있느라 고생 많으시다는 말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은 건 첫째는 무서웠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아뇨. 엄청 예뻐요."


진짜로 예쁘긴 엄청 예뻤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그 커다란 얼굴이 미소를 지었다고 느꼈다.


- 우대권 단편소설/수필 『에스컬레이터 요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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