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유랑기의 시작.
해가 진 뒤에, 을지로 삼가를 걸었다.
배를 타던 시절에는 밤을,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사라진 때라고 표현하곤 했었는데. 바로 다음날 아침을 제외한 미래에 대한 고민 전무하던 이병시절처럼 멍하니 걷다보니, 그 때처럼 물흐르는 소리가 근처에서 속삭였다.
쾅. 비틀대며 홀로 걷던 맞은편 골목의 할아버지는, 슬레이트에 기어이 몸을 던지고야 말았다.
울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지만 격하게 웅얼대는 입에는 무슨 억울한 사연이 담겨있을까. '인생 좆같네''에라이 죽일놈아' 따위의 대사를 혼자 머릿속에 넣어보다가, '내가 미안하오 임자.. 먼저 보내서...' 하는 신파극을 할때쯤에야 나는 얼른 발을 옮겼다.
서울의 매력중에 하나는 극과 극의 면모가 공존하는거라고들 한다. 그리고 그런 작은 서울들이 여기저기 있는데, 청계천만해도 그래서 구경거리가 된다. 주말밤이되면 회색철판에 간간이 노랗고 파란줄 그어진 슬레이트가 파도치듯이 내려와있는 벽돌 건물들 맞은편엔, 그런 모습에 혀를 차는듯한 키높은 금융사들 본사건물들이 눈을 흘기고(아, 점점 높아지는, 혹은 증식하는 어학원들도 빼놓을 수 없다).
가끔은 도로 한복판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궁금하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 잠깐 눈을 돌려보면, 늘 보던 건물들도, 풍경들도 참 느낌이 달랐는데. 휴양지에서 하늘구경하듯 멍하니 오랜 시간 본다면 그 풍경에도 질릴까, 더더 빠져들까? 아니면, 그런 특별함도 사실 내가 특별하다고 믿기때문이고 실제로는 평소 보던 것과 다를게 없을까?
차마 신호 깜빡거리는 횡단보도에 오래도록 서있을 용기가 없다. 신호를 무시하고 서있자니 불법이지만, 사실 불법이라서가 아니라 사람들 시선에 재단당할 것이 더 무서워 하지 못하는 것이 요즘이다.
지금의 나는, 횡단보도에서 사색은 커녕
청계천을 따라 죽 걸어가볼 용기조차 나지 않는다.
버스 차창으로 많이 봤던 곳, 살아오며 여러번 들렀던 곳들. 그저 내 발로 걸어서 가보지 못했던 곳들.
발목양말을 신고나와 발목이 시렵다.
그래도, 맘에드는 신발을 신으니 구두보다는 훨씬 가볍고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