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편 단편소설
면도를 할 때마다 고민이 되었던 건 젤과 폼 중 어느 것이 더 잘 맞을지였다. 젤의 치덕치덕하게 달라붙는 느낌이 나은지, 거품이 보송하게 덮어주는 느낌이 나은지. 신기하게도, 어느 쪽을 쓰든 살이 베이진 않을까 걱정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오늘처럼 갑자기 코 밑에서 핏방울이 맺힐 때는 깜짝 놀라게 된다.
‘아무런 느낌도 없었는데?’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양의 거품을 발랐고,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방향으로 밀었는데 느닷없이 피가 흘러나온 것이다. 서둘러 잔거품을 씻어내고 찬물로 몇 번 헹구고 나서야 피는 잦아들었다.
“저기. 나도 좀 헹궈줄래?”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오른 손에 들린 면도기가 말을 걸어왔다. 나는 미안하다고 말하며 황급히 친구를 찬물에 씻겼다. 문득 저 날에 내 피가 묻어있을거라 생각하니 아무래도 좀 미안했다. 어디선가 들었던, 면도기는 절대 다른 사람과 함께 쓰면 안 된다는 경고가 떠올랐다.
“놀랐냐?”
“어. 하나도 안 아팠었거든.”
면도기와의 첫 대화인데 어쩐지 오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기분이었다. 맘도 편하고, 말도 편하고.
“잘못됐다는 걸 처음부터 알기는 쉽지 않지. 일단 그 때는 안 아팠으니까. 네가 괜찮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덜 밀린 수염, 살짝 붉어진 피부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거야.”
하긴 그렇게 주의 깊게 면도를 한 적은 없던 것 같다. 충분히 잘 밀렸는지, 특별히 따가운 곳은 없는지만 확인하면 바로 다음 단계로 건너가곤 했지. 면도라는 건 세안과 가벼운 마사지, 거품과 면도, 이후 로션 혹은 애프터 쉐이브라는 여러과정을 포함한 일종의 예식이었다. 집안일로 따지면 세탁, 건조, 정리를 해야 비로소 마무리되는 빨래와 비슷하다고 해야할까.
“꼭 면도만 그런 건 아닐걸?”
생각을 읽은 건지 눈도 없는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봐왔다. 나는 잠시 묵묵히 면도기를 내려다봤다. 그 얇고 좁은 면도날에 문득 익숙한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괜찮아, 괜찮다. 난 착한 사람이니까. 그렇게 상처될만한 일들이 아니니까, 괜찮다.’
괜찮다고 넘긴 순간부터 잘 보이지 않았을 거다.
블라인드가 걷힌 새벽 창문에는 거품처럼 김이 서려있었다. 괜찮다며 대충 입고 다니던 사이 어느덧 겨울이 왔고 그렇게 감기를 앓았다. 이제 얼어붙은 땅이 녹으려면 동풍이 건 듯 불 때가 되어야 할 거다.
“그냥 괜찮은 줄 알았는데. 왜냐하면…….”
“그래, 네 거니까. 네가 제일 잘 안다고 생각했겠지.”
눈을 감고 한숨을 푹 내쉰 면도기는 다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것도 자세히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한 거야, 때론.”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면도기를 찬장에 올려놓았다. 반짝이는 면도날에서 물방울이 한 방을, 두 방울 톡톡. 자세히 들여다보느라 콧김이 서린 거울 너머로, 아물었다 생각한 자리에서 다시 핏방울이 맺힌 바보같은 내 얼굴이 보였다. 살아오며 처음으로 화장실 세면대에 턱을 괸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넌 어떻게 해야 멈출거니, 어떻게 해야 아물거니,
“넌 어떻게 달래야하니?”
우대권 단편소설 『면도』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