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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양이 Aug 20. 2019

아빠는 딸의 방 문이 열리길 기다린다

띠동갑 남매가 사는 법



아빠와 딸의 관계

일반화 하기에 다소 무리가 있지만 굳이 아빠를 두 부류로 나눠본다면 이렇게 나눠보고 싶다. 자상하고 살가운 아빠와 무뚝뚝한 아빠. 어릴 적엔 아빠와 친구처럼 지내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신기했다. 용돈을 달라고 전화를 하거나 힘들었던 일을 전화로 털어놓는 모습들 말이다. 우리 집 아이들의 경우 어릴 때부터 엄마 껌딱지로 자라서 보통 엄마를 귀찮게 했다. 엄마한테는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땡깡도 많이 부리고 여기가 아프니 저기가 아프니 앓는 소리도 많이(거의 매일) 하고. 가끔 용돈의 범위를 벗어나는 무언가 가지고 싶거나 친구들과 하고 싶은 게 생기면 하루 종일 엄마를 따라다니며 들볶았는데, 동생과 나의 입을 봉인해 버리는 엄마의 필살기가 있었으니.


"아빠한테 말해."


우리 집의 경제권은 아빠가 갖고 있었음에도 정작 아빠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했다. 말하면 안 사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뭔지 모를 미안한 감정은 왜 아빠에게만 생기는 것인지,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동생도 그런 걸 보면 힘들게 돈 벌어오는 사람이라는 인식은 있었나 보다. 아빠는 장난기가 많은 사람이어서 어릴 땐 아빠와 편하게 지냈다. 여기저기 나가서 뛰놀아도 제 시간에만 들어오면 혼내지 않았고, 매일 못생겼다고 놀리면서도 귀여워하던 모습이 생각나는 걸 보니 우리 아빠도 딸바보였던 것 같다. 하지만 자식이란 태어나는 순간부터 성장하고 변하는 존재인지라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것과 같은 한결같음을 바라면 상처 받기 십상이다.




방문을 두드리는 엄마, 기다리는 아빠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일 때 한창 스타크래프트의 인기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매일 온게임넷을 틀어 놓고 선수들의 플레이 영상을 보았고 학교에서는 교내 공식 스타크래프트 대회를 열기도 했다. 몰래 오락실을 다니던 아이들은 PC방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그런 시대적인 변화와 관계없이 늘 숨어있는 자식들을 찾아내러 오는 건 엄마였다. 내 학원 시간도, 내 교우관계도 늘 엄마 손안에 있다 보니 당연히 엄마와 더 자주 싸우면서도 더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특히 자식에 대한 부모 간 정보 차이는 자식의 사춘기를 지나며 더욱 심해진다. 내가 방문을 걸어 잠그고 침묵의 사춘기를 보내게 된 중학교 2학년 무렵, 나는 사춘기 이전과는 다른 딸이 되었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처음 겪어보는 첫 아이의 사춘기라 적잖이 당황했을 터였다. 그래도 엄마는 매일 과일이라도 먹으라며 (사식 넣어주듯) 방문을 열고 딸의 상태를 살피기라도 했지만 아빠랑은 그런 대화조차 부족했다. 단잠에 빠져 있어야 할 주말 아침을 다 같이 밥을 먹어야 한다며 강제로 깨워 앉혀 놓던 아빠와 침묵의 식사시간이 그저 스트레스였을 뿐.


어느 때는 소위 잘 나가는 친구들과 어울려 보고도 싶었고 유행하는 짧은 교복 치마를 입고 싶기도 했다. 유행하는 브랜드도 갖고 싶고 남자 친구도 만나고 싶은데 단속과 통금시간, 시험성적에 대한 압박도 부정적 에너지를 높이는데 기여했다. 그때부터 나는 하염없이 부모님(특히 아빠)와 멀어졌고 철이 들어 다시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까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딸이 아빠를 이해하기까지

어른들의 걱정은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어렸을 때 아빠가 했던 잔소리들, 예를 들어 미대 진학을 반대했던 일, 공무원이 되어 안정적인 삶을 살라했던 일, 뭐든 꾸준히 좀 하란 얘기들은 당시에는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본인 인생의 후회스러운 부분을 왜 나에게서 실현하려고 하는지, 애초에 이렇게 생겨먹은 딸의 성향을 고려하지 않은 것들이라 여겼다.(물론 지금 보면 아빠 말은 틀린 것이 없지만)


결국엔 아빠의 바람과는 다르게 자라났지만 그 과정은 아빠의 잔소리를 이해하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나는 아빠가 했던 말들을 자주 곱씹으며 성장했다. 돈 버는 게 이렇게 힘들구나, 안정적인 직장이 최고구나, 뭐 그런 것들. 그럼에도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사는 건 나는 지금의 내 인생이 좋고 내가 누리는 것들이 다 부모님 덕분이기 때문이다.


가정에 헌신적인 아빠였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이토록 희생할 수 있는지 나로선 엄두가 나질 않는 삶. 평생 펴오던 담배를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나의 약속과 맞바꾸고 포기한 일은 어린 나에게도 지금의 나에게도 잊지 못할 모습이다. 엄마는 아빠가 끈기가 없다며 자주 흉봤지만 아빠만큼 성실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아직도 전화를 해서 살갑게 구는 딸은 아니지만 가끔 술잔을 기울이며 두런두런 이야기할 수 있는 딸 정도는 되어서 다행이라 생각이 든다. 


내가 행복한 게 아빠의 행복이겠지만 나 또한 아빠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되었다. 우리 가족이 웃는 날이 많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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