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동갑 남매가 사는 법
기억을 거슬러 5년 전 즈음으로 돌아가 본다. 운 좋게 한 홍보회사 인턴으로 합격해 자취를 하게 된 때였다. 대학만 가면 세상 모든 자유를 얻을 줄 알았던 나에게는 예상치 못한 복병이 있었는데 바로 밤 10시부터 나의 귀가를 기다리던 아빠였다. 왕복 세 시간의 통학시간도 불행에 한 몫했다. 그리하여 나는 스무 살 때부터 독립을 외쳐왔지만 이사를 가는 한이 있더라도 여자 혼자 자취는 안된다고 완강하게 거부하던 아빠를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그 아빠가 취업을 하자 단박에 자취를 허락한 것이다.
독립은 단지 통금으로부터 자유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집에는 사춘기가 막 시작된 동생과 갱년기를 맞이한 두 인물 간의 기싸움이 벌어지던 참이었기 때문이었다. 갱년기와 사춘기의 호르몬이 누가 더 센지 매일 대결을 벌이는 집에서 나는 입사 티켓을 내고 출구로 달려갔다.
나도 사춘기 시절을 겪어 왔기 때문에 그 시기가 얼마나 지랄 맞은지 잘 알고 있다. 몇 년이 될지 모르는 기간 동안 호르몬의 숙주가 되어 도무지 합리적인 판단이 불가능하고 통제 불능이 되어버리는 상태. 반면 갱년기는 아직 내가 겪어보지 못한 일이라 섣불리 판단할 수 없었는데 쉽게 열이 오르고 불면에 시달리며 별것 아닌 일에도 쉽게 서운해지는 만만찮은 것임은 분명했다. 나는 어느 쪽에 서야 할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가끔은 동생의 엉덩짝을 한대 쳐주고 싶은 날도 있었고(나보다 커버린 동생이라 불가능했지만) 네가 이해해 라며 등짝을 토닥여 주고 싶었던 날도 있었다. 하소연할 곳이 나밖에 없는 엄마의 카톡에 바쁘다는 핑계로 모른 척 하기 일쑤였고 어느 날에는 짜증이 나기도 했다. 왜 집을 나와도 집 안의 일들이 눈에 그려지는지. 그래서 멀지 않은 거리였음에도 가끔씩만 주말에 집에 들르곤 했다.
엄마는 출가한 딸에게도, 보기만 해도 화가 치미는 동생에게도, 엄마에게만 잔소리를 하는 아빠에게도 화가 난 상태였다. 사춘기는 어리다는 이유로, 누구나 겪는다는 이유로 이해받기라도 하지 갱년기인 여성은 어디에다 하소연을 해야 하는 건지 답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 개의 빅시즌은 생각처럼 빨리 지나가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도 엄마는 가끔씩 본인이 갱년기라고 하는데 이쯤 되면 모든 비정상적 증상의 원인을 갱년기라는 이름의 정체불명 존재에 뒤집어 씌우는 게 아닐까 싶기도.(엄마 미안)
가끔 집에 가면 입구부터 냉랭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나름 화목했던 우리 집안의 암흑기였음은 확실하다. 엄마에게는 동생을 험담하며 조금만 참으라 위로하고 동생에게는 그 반대로 했다. 어느 편에 섰다가는 평생 원만한 관계가 되지 못했을지도 모르니까.
역시 시간이 해결해 주는걸까. 자기와 친구밖에 모르던 동생도 이제 가족의 마음을 이해할 줄 알고 제 할 몫도 성실히 하고 있다. 엄마도 나에게 전만큼 힘든 얘기를 안해서 그런지 몰라도 동생을 자랑스러워하고 속상해하는 일도 적어졌다. 그렇게 상처 주는 시간을 보냈음에도 언제 그랬냐는 듯 화합할 수 있는 건 가족이어서 가능한 일일 테지. 그 시간을 나 혼자 회피해 버린 것 같아 이제와 죄책감이 들긴 하지만 오늘도 나는 이해와 양해를 구하는 염치없는 딸이 된다.
한 지붕 아래 사는 가족이어도 서로를 알 수는 없다. 오히려 가족이라 할 수 없는 이야기가 더 많지 않나. 힘든 일은 가족과 함께 하면 반이 아니라 배가 되니까. 나만큼 힘들어하고 슬퍼하는데 어찌 감정을 그대로 전달하겠는가. 그럼에도 각자의 시간들을 버티고 견뎌 지금의 우리 가족이 있게 된 것에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가족이라는 이유는 이해를 바랄 때가 아니라 이해를 해줄 때 적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