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면서 정리하기
8월에는 생활에 변동이 크다. 일단 일을 그만둔다. 일을 그만두면서 여러 생각을 했는데, 입국하자마자 스스로에게 숨돌릴 틈도 주지 않고 바로 일을 구한 것이 썩 좋은 결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조바심이 너무 큰 탓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숨돌릴 틈을 줬더라면 더 일하기 싫었을지도 모르고, 어쨌든 몇 달이라도 일을 한 덕분에 이사 비용이라도 벌어 무사히 이사를 할 수 있었으니 잘 된 일이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내가 얼마나 일을 하기 싫어하는지 신물나게 깨달은 탓에 새로운 생활을 결심할 수도 있었다.
호주에 있는 동안 글쓰기/운동/인간관계/수입 이렇게 4가지 항목으로 매월 생활을 정리했다. 지금은 저 항목들이 의미가 없다. 수입은 없을 거고, 인간관계도 돌보지 않을 거다. 운동은 운동이 아니라 그냥 생활의 일부이므로 굳이 체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다. 일을 그만두고 싶었던 계기가 몇 가지 있는데 가장 먼저는 일이 하기 싫어서. 두번째는 눈 뜨자마자 헬스장에 가고 싶어서. 세번째는 벨리댄스를 배우고 싶어서였다. 최근 연락온 회사에 갈까말까 고민할 때도 '근데 여기 가면 눈 뜨자마자 헬스장이 아니라 회사를 가야되잖아' 하면서 안가기로 결정했다. 도대체 생각이 있는거냐고 (우리아빠가 자주하는 말인데) 추궁당해도 할 말이 없다. 아빠는 내가 생각없는 걸 알면서 왜 자꾸 그걸 물어보는걸까?
2019년 1월에 '새해 목표'라고 다이어리 앞에 가득 적어놨던 것들을 다시 펼쳐봤다. 그것들을 지금도 이루고 싶냐고? 아니다. 변덕쟁이다. 그러니 무슨 목표를 세운들 얼마나 갈까 싶다. 일을 그만두고 무얼 하고 싶은지 쭉 적어놓은 것도 있는데 그 중에 지금도 하고 싶은 게 있는가? 역시 거의 없다. 초변덕쟁이다.
그럴수록 적어놓을 필요가 있다. 내가 뭘 원했는지 나도 잊어버리니까.
2019년에 하고 싶은 건, 조직사회에 들어가지 않고서도 먹고 살 루트를 찾는 것.
일을 그만두고 하고 싶은 것은
-눈뜨자마자 헬스장에 가는 생활 (운동을 위해서라기 보다 안그러면 방구석에서 폐인이 될 게 뻔히 보여서...)
-벨리댄스 배우기
-사진찍기 (분수에 맞지 않게 또 카메라를 샀다!)
막상 적고보니 이것 뿐이네. 좋다. 자잘자잘한 것들이 있긴 하지만 여기 적을만큼 하고 싶진 않은가보다. 영어공부나 중국어공부 같은 것들은 그때그때 하면 될 것이고, 주기적으로 꾸준히 하고 싶은 것들은 위의 세 가지로 추려졌다. 기억해야 할 건, 내가 이렇게 적어놓은 걸 대부분 이루면서 살아왔다는 거다. 그러니까 나는 눈뜨자마자 헬스장에 가고, 벨리댄스를 배우고, 사진도 찍고, 루트도 찾아보면서 살 거다. 별로 어려운 거 아니잖아 그치.
앞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못 미더웠던 것은 스스로에 대한,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다. 아까 누워서 책을 읽는데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정말 많이 받으면서 살아왔구나! 누워있던 몸이 벌떡 일어났다. 애틋한 마음이든, 물질적으로든, 많이 받지 않고서 이때까지 살아올 수 없었을 거다. 나는 그에 대해 충분히 감사했나? 그에 대해 충분히 보답했나? 생각해보니 많이 부끄러웠다.
어쨌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한층 덜어내자면, 내 자신이 미덥지 못하더라도 내 능력이 딸리더라도 나는 도움을 받을 거니까 괜찮을 거다. 의존적으로 살라는 건 아니지만 아무 도움도 받지 않고 살아가는 것 역시 말이 되지 않는다. 받은 것들에 감사하고, 보답하려는 자세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도 하다니 기특하다. (행동은 아직 안함)
그동안 받아온 것들 덕분에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낼 수 있었다. 나에게 애정을 준 사람들, 먹이고 입히고 재워주며 보듬어 준 사람들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