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려 깊은 눈들

by 사색의 시간

소설 수업에 들어가려는데 엘리베이터 앞에서 S를 만났어요.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설 정말 좋았어요!"

그리고 제 소설의 어떤 부분이 좋았는지 세심하게 일러주었어요. 와, 글을 이렇게나 열린 마음으로 꼼꼼히 읽다니. 마음을 열기도 꼼꼼하기도 쉽지 않은데 그녀는 둘 다 장착된 사람인 듯했어요. 그리고 조금 부끄러웠습니다. 저 역시 그녀의 소설을 읽었지만 그녀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거든요. 감상을 잔뜩 받기만 하고 저의 감상을 주지 못한 것이 민망했습니다. 다음 주에는 꼭 나의 감상을 들려줘야지. 목표가 하나 생겼네요.


소설 수업을 들어서 정말 소설을 잘 쓰게 되었나요?라고 묻는다면, 조용히 웃게 될 것 같아요. 저 역시 그게 가장 궁금했거든요. 잘 쓰고 싶어서 듣는 거니까요. 수업을 듣는 동안 소설에 품었던 조급한 마음을 조금씩 내려놓게 되었고, 장면을 만드는 일이 노동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어렴풋이나마 독자의 자리를 가늠해보게 되었어요. 무언가를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얼마나 정성을 들여야 하는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잘 쓰는' 문제는 앞으로 이것들을 종이 위에 펼쳐놓으며 해나갈 일인 것 같아요.


최근 책을 읽든 영상을 보든 친구들과 대화를 하든, 반복적으로 주어지는 메시지가 있었어요. [대충 하지 말라.] 그 메시지를 보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아, 귀찮은데'였습니다. 저는 많은 것들을 대충 하며 살았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적어도 글만큼은 대충 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완벽주의를 탈피하기 위해서 대충 하기를 택했거든요. 아무것도 못하고 벌벌 떨면서 살 바엔 마구 저지르며 살자. 그게 제 모토였습니다. 처음에는 '대충 하지 말라'는 말이, 대충 하는 저를 나무라는 말로 들렸어요. 지금 다시 보니 이제 '대충'의 단계를 지나 '정성을 들여'하는 단계로 가볼까? 하는 따스한 손길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정성을 쏟는 걸 무서워했거든요. 잃을 까 봐. 배신당할까 봐.


선생님은 누누이 강조하십니다.

"내 감정, 내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보다 독자가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쓰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세요."

"독자는 작가의 진실에 관심 없어요. 소설의 진실에 관심 있어요."

내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면 그게 소설의 진실이 되는 것 아닌가? 작가의 진실과 소설의 진실이 뭐가 다르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지금은 이렇게 이해하고 있어요. '내가 아는 것은 최대한 내려놓고 읽는 입장에서 납득이 되는지 볼 것'. 마치 수행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설을 쓰는 것은 자본주의에 반하는 일이래요. 자본주의는 더 많이, 더 빨리 해야 하는데 소설은 같은 장면을 읽고 또 읽게 만드는 일이고, 그 이야기에 머물게 하는 일이래요. 저는 이게 참 좋았어요. 누군가의 마음에 머물고 싶다. 처음으로 그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누군가가 나를 잊어주기만을 바라며 살아왔는데 말이죠.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이야기를 발견 해내 주었구나."

저는 줄곧 회의적이었어요. 아무도 말하지 않는 이야기를 말하는 게, 무슨 의미인가. 많이 읽히는 이야기를 쓰는 게 내 (통장의) 입장에서 좋은 일 아닐까. 하지만 선생님의 말씀이 마음에 울렸습니다. 어쩌면 그게 나의 역할일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들었어요.


오늘 아침 명상을 하고, 요가를 하고, 글을 씁니다. 조금 전 이런 글귀를 봤어요. "명상은 신의 언어이다." 그러고 보면 운동은 몸의 언어라고 할 수 있죠. 신의 언어, 몸의 언어, 인간의 언어를 쓰면서 사는 삶. 그것에 내가 원하는 삶이었구나. 알게 되었습니다. 언어가 있음에 감사합니다.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다른 이의 마음을 살피는 일도 없이 오만하게 살았을지도 모릅니다(지금도 그렇지만 째끔 나아졌습니다).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언어 바깥의 일들까지 둘러볼 눈을 가지게 됨에 감사합니다. 오래전부터 이미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봐주었던 많은 존재들에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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