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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나는 못 썼다

by 사색의 시간

백수가 되고 하루에 오천자씩 쓰기로 했다. 첫날이야 어떻게든 오천자를 채웠으나, 그 뒤로는 천 자 채우기도 막막하다. 아침 아홉시에 스터디카페를 와서 4시간 째 웹서핑을 하고 있다. 검색창에 '미루는 이유'를 검색해본다. 동기부여와 열정이 부족해서라고 한다. 나는 동기가 없다. 그냥 쓰고 싶을 뿐.


도대체 얼마나 동기가 부여되야 하고, 얼마나 열정이 있어야 하는걸까? 스스로를 동기와 열정이 부족한 인간으로 규정한들 오늘의 미룸이 정당화되지 않는다.


오전 다섯시부터 여덟시까지는 빈둥거렸다. 빈둥거리다 첫눈을 보았다. 아침의 세 시간이 하루 중 얼마나 중요한 시간인지 많이 보아왔고 읽어왔다. 미라클 모닝이니, 루틴이니 하는 것들을 통해 이 시간만큼은 어떻게든 생산적인 시간으로 사수하라는 메시지를 무수히 반복해 새겨왔다.


그런데 나는 그냥 이 세 시간을 빈둥거리는 것이 제일 좋다. 어제 걔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 수업을 들으러 갈까 말까. 나는 왜 그런 것들이 좋을까. 두서없는 생각들을 하면서 이불의 촉감을 만끽한다. 따뜻한 물 한 잔을 마시고 잠시 명상을 하고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것이 나의 루틴이라면 루틴이랄까.


일찍 일어나서 그 시간을 생산적으로 보내지도 않고, 세웠던 목표를 달성하지도 않는다. 미이행 목록만 체크해가는 것은 패배감을 고양시키는 것일까? 나는 그냥 오늘의 나를 직시하고자 하는 것뿐이라고 말해본다. 내가 해내는 것들과 해내지 않는 것들을 지켜본다.


나이가 들수록 지켜야 하는 것은 '세련미'라고 한다. 세련미가 뭐지? 검색창에 글자를 쳐본다. 검색결과는 무한히 많지만 나는 그것들이 그다지 세련되게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때마다 괴롭다. 나는 왜 남들이 세련되었다고 말하는 것들을 세련되었다고 느끼지 못하는 거지? 화가 난다. 세련되었다거나 촌스럽다거나. 예쁘다거나 못생겼다거나. 너무나도 개인적인 가치들 아닌가. 나는 무엇을 세련되었다고 여기나. 그거나 알아야겠다.


이번 백수생활의 목표는 불안과 죄책감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이것도 목표로 세워버리면 달성을 못하게 되려나. 자꾸만 공백에 의미를 부여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목표가 없으면 실패한 사람처럼 보일까봐 자꾸 목표를 만든다. 목표가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그냥 살면 안 될까. 나는 요즘 고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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