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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움에는 한계가 있으나, 인내는 한계가 없다.

천 년 뒤의 들판에서 다시 만나자

by 김봄

H가 묻는다.

"너는 당하면 반드시 돌려주는 자비 없는 삶이잖아. 고독하게 개척하는 네 길에 지뢰를 매설하는 놈들에게."


B는 대답한다.

"그렇지. 다른 길이 있는지도 몰랐고 그게 내 인생으로 받아들였거늘."

"... 음... 아니야. 어쩌면 다른 방향으로 걸어갈 수 있었을지도..."

"다시 태어난다면 다른 길로 나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수도..."


H가 반박한다.

"너답지 않은 소리를 하는군. 다음이 아닌 지금 남은 생에서 다른 길로 충분히 갈 수 있을 텐데"


B의 침묵이 길게 이어지고 대답한다.

"지금 다른 길로 시작한다면 살아온 나의 흔적이 모두 부정당할 수 있는 끔찍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군."

"네가 나에게 조언을 하는 것 자체가 거만(倨慢)하다는 생각은 안 해본 거냐"


H의 표정이 바뀐다.

"오만(傲慢)하네. 재수 없는 놈."


B는 갑자기 웃으며 소리 내어 웃는다.

"재수 없는 놈보다 지독한 놈이라고 불러주는 게 더 듣기 좋을 것 같구나"

"아무것도 없는 네가 남을 기만하는 것 자체가 이미 모순이거늘."


H는 억지로 웃는 척을 하며 B에게 속삭인다.

"아쉽네,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지독한 놈."


B의 웃음은 광기를 보이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건방 떨지 말거라. 너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경험과 노력이 내 안에 녹아있단다."

"태만(怠慢)하고 자신감도 없이 자만(自慢)하는 너를 내가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본 거냐."


H는 잠시 주춤하더니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너는 나와..."


B는 말을 끊고 말한다.

"나에게 주어진 기적은 우연이지 필연이 아니거늘. 그러나 네가 죽는 이유는 필연이다."


H는 먼지가 되어 사라지며 마지막 말은 남긴다.

"미치도록 웃기는군, 너는 나다. 나를 죽여도 달라지는 건 없다. 네가 만만(滿滿) 해 보이기까지 한다."

"평생 풀 수 없는 저주로 너를 끝까지 괴롭게 만들겠다."

"죽기 전까지 불만(不滿)을 가지고 살아가는 저주를 가진 네가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B의 눈앞에서 H는 사라졌다. B가 뒤돌자 그의 그림자에 저주가 붙으려 했지만 저주가 갑자기 멈추며 놀란다. B의 그림자 속에 처참하게 퇴치당한 셀 수 없는 저주의 시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B는 다시 되돌아 웃으며 저주에게 말한다.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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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 2025.04.28

저자: 김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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