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 안 받는 사람이 어딨어?"
"어딜 가나 사람 다 똑같아."
"우선 견뎌 봐, 견딜 수 있을 때까지."
"퇴사하면 당장 뭐 먹고살 건데?"
내가 줄을 놓기로 하자 들려오는 소리들. 대체 줄이 뭐기에.
줄
「1」 노, 새끼 따위와 같이 무엇을 묶거나 동이는 데에 쓸 수 있는 가늘고 긴 물건을 통틀어 이르는 말.
「2」 길이로 죽 벌이거나 늘여 있는 것.
「3」 (수량을 나타내는 말 뒤에 쓰여) 길이로 죽 벌이거나 늘여 있는 것을 세는 단위.
「7」 사회생활에서의 관계나 인연.
(#표준국어대사전)
줄 하나 믿고 태어나 여태껏 바득바득. 이제는 그 줄 부여잡고 그럭저럭 살다 보니 내 목숨 줄에도 이 줄 저 줄이 주렁주렁 들러붙는다. 탯줄, 핏줄, 밥줄, 연줄……. 줄줄이 달려오는 잔가지 줄들.
툭.
이제 난 그중 한 개의 줄을 스스로 끊는다. 내가 끊은 이 줄이 부디 썩은 동아줄이었길 바라며 나는 분해된 밥줄을 무심히 바라다본다. (그동안 날 단단히 살찌우던 든든한 밥줄이어서인지 자꾸만 애처롭게 뒤를 돌아다본다.) 마음을 정한 후 나는 나 자신에게 우선 통보를 한다.
너, 사표를 곧 제출할 거야. 준비됐지?
그리고 그동안 퇴사를 응원하거나 혹은 퇴사를 말리던 친구들에게도 이 속보를 급히 타전한다. 친구들은 어찌 되었든 잘했다고 말해 준다. 그리고 이 소식만큼은 끝내 듣고 싶지 않았을 가족들에게도 '내 밥줄 끊어지는 소리'를 들려준다. 힘들었으니 어쩔 수 없지, 라고 등을 두드려 주시지만 가족들은 안타까워한다. 내가 너무 일찍,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것은 아니냐며…….
나도 다시 한번 더 생각한다. 혹시 이 줄일까? 이 줄이 나를 세상에 단단히 묶어 둘 수 있는, 또한 굳세게 나를 동일 수 있는 운명의 줄이었을까? 나, 너무 성급하게 이 줄을 놓으려는 것일까? 자꾸만 나 자신에게 질문을 해댄다.
-너, 이 든든한 밥줄을 내던지고, 정말 그 흉흉한 '산 입에 거미줄'을 치려는 거야?
-하지만 그 밥줄이 나를 거미줄처럼 꽁꽁 동여매고 옴짝달싹 못 하게 서서히 나를 녹이고 죽이는 걸.
“안녕하세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내가 한 번 더 숙이고 한 번 더 접자는 생각을 했다. 또 한 번 더 숙이며, 어떤 날은 동료에게 내가 먼저 인사를 먼저 건네도 본다. 그런데 지나치며 상대를 슬쩍 건너다보니, 그녀는 휴대폰에만 자신의 눈을 박고 있다. 내 목소리를 다 듣고도 내 존재에는 아는 척을 생략한다. 요새 그 동료에게는 웬일인지 나만 안 보인다.
어머, 오홍홍홍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라고 상대가 말해 주기라도 할 줄 알았던 거냐, 나? 꿈도 크다고 나 자신에게 말해 준다. 갈등만으로 만 5개월을 보낸 사이. 그 척박한 여건 사이사이에서 씨가 말라 버린 동료애. 나는 애써 자신을 두들기며 버텨 버텨, 라고 독려해 본다. 다시금 앞으로 넘어질 것을 알면서도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걸던 그 주문을 나 자신에게도 자꾸만 왼다.
버텨, 버티라고, 이놈아.
사실 요즘 들어 투명 인간 취급을 종종 받는다. ‘능력치’도 제로로 폄훼되고 존재감도 제대로 투명하다.
“너, 예전 사○월드 프로필에 '먼지야, 힘 빼.' 이렇게 써 놨었잖아.”
그런데 친구가 어느날 내게 말한다. 요새 힘들다며 좌절 한 대접을 친구 앞에다 늘어놓았더니 친구가 갑자기 내 과거를 소환한 것이다. 너, 너 자신한테 ‘먼지야, 힘 빼’라고 말하면서 살았었어. ('먼지야, 힘 빼.'는 내가 정말 좋아했던 드라마 ‘아일랜드’의 대사였다.)
"네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렇게 좋아하던 직장을 관두나 싶더라."
우리의 대화 접시에 과거의 내가 오른다. 그 접시에는 ‘자유롭고 가볍게, 힘 빼며 살아가기’가 목표이던 과거의 내가 등장한다. 그 대화의 접시 끝에 손을 가만히 갖다 대 본다. ‘먼지야, 힘 빼’라는 제목의 이 음식,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다. 나는 그 접시에서 ‘힘 뺀 먼지’ 한 톨을 집어 든다. 그래, 이제 우리 그만 힘 좀 빼자. 이 악 물며 버티는 일 따위는 그만하고.
나는 줄을 놓기로 한다.
툭.
줄 하나가 끊긴다.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에 내 가족들이 나보다도 더 놀란다. 그래도 이 줄은 그동안 너를 잘 먹여 살려준 밥줄이 아니더냐고, 그게 어디 그렇게 쉽게 끊어질 줄이었냐고, 이름도 꽤 멀쩡한 직장 아니더냐고, 네 인생 처음으로 제대로 된 직장이 아니더냐고. 계약직이지만 버티면 계속 다닐 수도 있는 직장이지 않았더냐고. 가족들이 안타깝게 내 빈손을 바라보는 것만 같다.
죄송하지만 저 이제,
제 인생에서 잠깐 졸게요.
그만하면 됐다. 이제 누군가의 무릎을 빌려 한숨 푹 자고 싶다. 오래도록 겨울잠을 자고서 눈을 떴을 때 이 모든 게 한여름 밤의 꿈이었으면 좋겠다. 여름부터 시작되었던 이 잔혹한 이야기의 결말이 어디로 흘러들지 아직 알 수는 없다. 다만, 이 한여름밤의 꿈, 조금쯤 악몽이어도 괜찮다. 어차피 꿈은 꿈일 뿐이다.
나, 이제 좀 잠들어 보려 한다.
내 인생에서 잠깐 졸아야 할 시간이 온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