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넷, 너를 처음 만났다

이사일지 3일 차

by 봄책장봄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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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일지_2일


......내 탓이었겠지. 만일 내가 자주 백수가 아니었다면, 혹은 종착지로 알았던 마지막 직장마저 그만둬 버리는 사태로 이 상황을 이렇게 이끌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우리 계속 601호였을까?







스물넷, 너를 처음 만났다(이사일지_3일)




그랬다면, 어땠을까? 우리 계속 601호였을까? 가정은 무의미하다. 나는 이미 너를 떠났다.



처음 너에게 정을 들였던 그날을 문득 떠올린다. 스물넷의 마지막 겨울, 서울 촌구석에서 경기도 도시로 이사를 왔다. (서울이 특별'시'이고 경기도는 '도'지만 내 입장에서 이곳은 도시였다. 아파트 뒷문으로 나가면 대도시에나 볼 법한 12차로가 차들의 종횡무진과 함께 번쩍였다.)


처음 너를 봤을 때 너는 참 정이 없는 곳이었다. 휑했다. 주변에 그 흔한 마트도 없었다. 저 멀리로는 비닐하우스로 된 농원과 도시 외곽에서나 볼 법한 넓은 평수의 음식점들이 있었고, 다른 한쪽으로는 네온사인이 휙휙 돌아가는 술집들이 누군가를 유혹하고 있었다.


사람 사는 곳이라기보다 밤에만 사람들이 다녀가는 곳처럼 보이기도 했다. 술집이 많았고, 근처 공공기관에서 이 동네까지 술을 먹으러 온다는 소문도 있었다. 멀쩡히 길을 지나다가도 ‘들어오세요’라는 문구로 여자인 나까지 유혹하는 헐벗은 언니들을 맞닥뜨리기도 했다. 늘씬한 언니들이(아니 나보다 어렸을 그들이) 전광판에서 현란하게 반짝였다.


“두 분이세요?”


늦은 밤 직장에서 돌아오던 날, 우리 모녀를 보고 들어오라던 나이트클럽 아저씨. 엄마와 나는 이 말을 듣고 실소를 했고 아직도 우리는 종종 그 이야기를 꺼낸다. 국빈관인지 영빈관인지 중화요릿집 같은 이름의 나이트클럽에서 호객 행위를 하던 어떤 아저씨 한 분이 어깨에 뽕이 들어간 듯한, 그리고 위아래가 퍼런 나이트클럽 유니폼을 입고서 우리에게 건네던 말이다. 두 분이세요? (여기로 들어오세요.)


엄마는 '내가 그렇게 젊어 보였나'라며 그때를 추억하신다. 이것도 네가 남겨 준 추억거리겠지.



그러나 아이들을 키우기에는 적절한 장소가 아니라고, 처음에는 생각했다. 언젠가 한번은, 인도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던 어떤 사람이 얕은 속도로 인도를 지나가며 종이를 흘리고 다니기에 “어, 뭐 떨어졌어요!”라고 말하려다가, 그가 흘리고 간 종이 쪼가리들을 보고는 입을 꽉 다물었다.


일부러 떨어트리고 다니는 것으로 추정되던 그 종이 쪼가리에는 술집 광고와 여자 광고까지 함께 나뒹굴고 있었다. 사람뿐 아니라 글자까지 야릇했다. 어린아이들이 볼까 걱정이 될 정도로.


그렇게 내가 너에게 느낀 첫인상, 그것은 ‘퇴폐’와 ‘다소 삭막’이었다.



넌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전철역을 끼고 있었다. 그 전철역 계단을 힘겹게 오르기를 몇 년. 선거 때마다 나오는 에스컬레이터 설치 공약은 기대도 안 할 즈음, 드디어 에스컬레이터가 전철역 입구마다 생겼다. 총 8개의 입구 가운데 사람들이 드물게 다니는 두 곳을 빼고 모두 에스컬레이터가 생겼다. 사람들이 너에게 드나드는 속도가 그 덕분에 빨라졌다. 점점 속도가 붙어서일까. 갑자기 너는 빨리빨리 거듭거듭 변하기 시작했다.


테크노밸리 같은 건물들이 여기저기 생겨나기 시작했고 네 동네를 드나드는 사람들이 그야말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처음 네 전철역에는 CD를 팔던 상가가 있었는데 이제 그런 레트로 감성은 이미 예전에 사라졌고, 죽었던 상권이 어느새 팔딱팔딱 살아났다. 지금은 전철역 상가에 커피집 한 곳과 떡볶이집 두 곳, 편의점 한 곳, 떡과 간식을 파는 곳 한 곳, 간이로 설치한 옷가게가 하나. 가게가 참 많이도 생겼다.


스물넷이 되어 온 곳에서 마흔이 갓 넘을 때까지 내가 변한 만큼, 아니 내가 늙은 만큼 너도 변했다. 그런데 나와 다르게 너는 늙지 않고 점점 젊어지는 느낌이다. 술집이 많아서인지 조금 느끼한 중년 아저씨 같았던 처음의 너는 이제 카페가 훨씬 더 많아져 조금 더 발랄한 아가씨 같이 변했다.



아가씨였던 나는 이제 중년 아저씨의 나이가 되어 간다.

‘내 아가씨'는 온통 이곳에 남겨 둔 채로...


아마도 그래서 내 발걸음을 네게서 떼는 일이 더 더뎠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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