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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Dec 20. 2020

너를 잊지 못하는 것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이사일지_11일 차

이사일지 10일 차 태어나고 죽는 대신 사고 팔린다 (brunch.co.kr)







너를 잊지 못하는 것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_이사일지 11일 차      



    

어쩌다 한 번은 너도 떠올릴 수 있겠지만 이건 너무 자주다. 아마 이사일지를 쓰기로 해서 더 그런 것 같다. 너를 떠올리는 이 감정들이 달아나는 게 아쉬워서 이사일지를 쓰기 시작한 것인데 이제는 이사일지를 너무 자주 쓰다 보니 없던 감정도 멜랑콜리하게 도로 나를 찾아든다. 집 나간 울적함들도, 나들이 나갔던 추억들도 601호라는 이름으로 자꾸 회귀한다.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향수병자들처럼.     



너를 떠나기도 전에 향수병에 단단히 걸렸던 이유는 여럿이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곳에 나의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의 가족이 내 옆에 단단히 있어 주고 있지만,) 내가 너에게 말하는 ‘가족’이란 601호에서의 가족이다. 그때 그 시간 속에 있던 우리 가족.     


복지관에 다닐 때는 방과후교실 교사여서 늦게 출근하고 늦게 퇴근했다. 새벽 2시, 3시까지 엄마와 잡담, 수다를 떨었던 적도 많다.(다음 날 1시까지 출근이라는 핑계로.) 아버지는 직장이 먼 내가 집에 도착하는 시간이 밤 11시가 다 된다는 이유로 전철역까지 매일 마중을 나오셨다. (엄마의 강요 아닌 강요로 매일 퇴근 마중을 하셔야 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그래도 개근상을 드려 마땅한 우리 아버지에게 이 지면을 빌려 다시 뼛속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우리 쌍둥이. 내 사랑 쌍둥이를 0살 때부터 이 이모가 키웠다! 라고 너무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은 1년 4개월 동안 조카 쌍둥이가 우리 집에서 먹고 자고 싸고 다시 먹고 자고 싸고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도 동생네가 바로 옆 동네에 붙어 살았으므로 601호에서는 조카들 장난감 방이 따로 있었다.)      


조카를 안고서 잠들기를 수차례였고 밤잠 설친 이모는 아침에 잠들어 낮 12시에 일어난 적도 많았다. 시집도 안 간 처녀가 아가를 돌보고 보듬고 키우는 ‘산 경험’을 했다. 백수였다, 그 당시. 그래서 더 격렬히 육아에 동참했다. 육아 인력이 절실하던 우리 가족이었다.      


손싸개, 발싸개를 하던 시절부터 고개 가누기와 배 밀기, 엉금엉금 기기, 두 발로 보행기 밀고 다니기, 두 발로 뛰어다니기 등등. 지구 밖 아이가 자기 엄마의 자궁을 빌려 태어나 지구 안 사람으로 적응할 때까지의 그 모든 낱낱의 과정을 탐험했고 그들과 함께했다. 나의 조카육아 역사가, 내 귀여운 조카들의 어린 시절이 그곳에, 눈만 돌려도 곳곳에 묻어 있었다. 방문 손잡이에 캐릭터 스티커들이 붙어 있는 곳. 보물찾기 놀이를 하겠다고 벽에 가위표를 칠하고, 자기들 장난감 방 한쪽 벽에는 무한 상상의 그림(낙서)을 펼쳐 놓았던 그곳.     



내 자식들도 아닌데 내 자식들 키운 집을 떠난다는 느낌이 들어 참……. 참 그랬다. (뭐가 ‘그랬다’는 것인지 말로 표현을 잘 못 하겠다. 그저 이상하게도 눈구멍뿐 아니라 콧구멍 두 개에서도 짠물 같은 것이 나올 정도로 참 ‘그렇다.’)     



그리고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바로 그때의 나.     


그래. 601호, 너를 잊지 못하는 게 아니라 나는 ‘나’를 잊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때의 나를……. 가족과 행복했고, 이 고민 저 고민에 방황했던 그때의 나를 잊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너에게 두고 온 나를 자꾸 돌아본다. 뭔가 잘려 나가는 내 ‘한때’를 느끼는 기분이다. 지금 나는, 너무나 열정적으로 살았고, 격정적으로 실패만 했던 그 시절의 나를 잃는다. 실패를 잊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지만 나는 원래 실패만 하던 인생이라 내 인생에서 실패를 빼면 남는 게 없다. 그래서 실패라도 바리바리 싸 가지고 이사를 가야 한다. (아니, 이제 이건 버려야 하나?)     



그래, 어찌 되었든 나는 너를 잊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아마도 이유 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너를 잊을 수 있을지, 아닐지 나도 기다릴 뿐이다.   

그저 그동안 잘 지내고 있자, 너도 나도.      



(이렇게 쿨하게 이별을 말하려는데, 난데없이 너한테서 전화가 오네. 무슨 일이지?)




(표지출처: unsplash@Blake Whee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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