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일지 13일 차
이사일지 12일 차 너의 소식을 멀리서 들었다 (brunch.co.kr)
이사일지 13일 차_누구냐고 물어도 답이 없다
누구세요?
말이 없다.
‘똑똑’
두드리기까지 하네. 누가, 아니 무언가가 빨리 우리 집으로 들어오고 싶어 하는 모양인데? 대체 누구지? 아니, 뭐지? 이제 택배 올 것도 없는데?
이사를 오고 나서 아주 우리 집, 아.. 벌써 ‘우리 집’이라고 해서 601호, 너에게는 미안하다. 섭섭하겠지만 이젠 이사 온 새 집이 우리 집이어서 어쩔 수가 없네. 명칭은 네가 이해해 주길. 아무튼 우리 집 문 앞은 새로 산 가전이나 가구, 자잘한 생활용품을 담은 택배 상자들로 문정성시를 이뤘다. 하루가 머다 하고 사람들이, 택배들이 들락날락. 이사 후 2~3주가 아주 혼잡하게 지나갔다.
17년, 혹은 27년이 넘은 물건들도 많아서 버릴 것 안 버릴 것 다 버리고 왔더니 새로 사야 할 게 많았다. 그래도 요 며칠 사이에 시킨 택배는 없는 것 같은데? 동생이 뭘 시켜 줬나?
대문을 두드리기에 나가 본다. 전 주인이 파랗고 예쁘게 칠해 놓은 현관문을 연다. 하얀 스티로폼이 곱게 우리를 쳐다본다.
‘응? 뭐지? 음식인가?’
"엄마, 누구한테 뭐 음식 올 것 있어요?"
"아니, 없을 텐데."
이사 간 것을 거의 알리지도 않아서 누가 ‘이사 경축!’이라며 뭘 보내 줄 사람도 없을 텐데 웬 택배다. 가만 보자. 주소와 이름을 얼른 확인해 봐야지.
주소는 우리 집이 된 그 주소가 맞다. 그럼 이름은?
공○○
'공? 누구지? 낯익은 이름인데?'
"누구한테 온 거야?"
식탁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던 엄마와 아부지가 묻는다.
공○○이요,
라고 발음하는 순간 알겠다. 아하!
"누구라고?"
"공○○! 이 집 전 주인들!"
"전 주인?"
"어. 여기 공동명의였잖아. 지○○랑 공○○, 부부 공동명의! 누군가 했더니 부동산 계약서에 있던 그 여자분이네."
대체 뭐지? 식품의 종류를 확인해 본다. 주소 밑, 이름 밑에는 괄호를 열고 닫은 그 사이에 식품 이름이 쓰여 있다.
응? 낙지젓갈? 젓갈류는 거의 안 먹는 우리 집이라 젓갈류를 택배로까지 시켜 먹는 게 조금 신기하다.
"엄마, 낙지젓갈이라는데? 잘못 두면 상하는 거 아니야? 어떻게 하지? 얼른 연락해야겠지?"
여자분 전화번호는 몰라서 남편분한테 우선 문자를 쳤다.
안녕하세요. ○○아파트 ○○○에 새로 이사 온 사람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 님 앞으로 택배(낙지젓갈)가 와서요. 어디에 맡기면 될까요?
엄마의 휴대폰으로 문자를 쳐 본다. 부동산이랑 친해 보이던데 부동산에 맡겨야 하나, 아니면 경비실에 그냥 맡겨 버리면 되나. 이사 온 것도 백만 년 만이고 남의 택배를 받아 본 것은 또 처음이라 잘 모르겠다.
어이쿠. 죄송합니다ㅜㅜ
제가 낙지젓갈을 두 개 시켰는데 2개 다 그리로 도착할 듯합니다.
경비실에 맡겨 주세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문자 하나가 더 급히 도착한다.
택배가 무려 세 개나 있다고 하네요.
죄송합니다.
네. 그럼 두 개 다 도착하면 같이 경비실에 맡길게요.
또 다른 문자 하나가 아까보다 더 급한 속도로 도착한다.
아, 따로따로 도착할 것 같습니다.
경비실에 맡겨 주시는 대로 찾아가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분주함이 느껴지는 다음 문자가 또 날아든다.
하나는 주소 변경하였습니다. 두 개만 도착합니다. 감사합니다.
네.
그날은 하필 내가 일을 나가는 날이라 낙지젓갈을, 나이 드신 아부지가 경비실로 나르셨다. 그것도 두 차례에 걸쳐서. 그리고 두 번째 택배는 무거워서 손수레도 이용하셔야 했단다.
경비실에 낙지젓갈과 곰탕, 택배 2개 모두 맡겼습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전 주인과 마지막 문자를 주고받는다. 지금 이사 온 곳의 전 주인을 통해 우리는 오늘, 우리 또한 601호의 전 주인이었음을 상기한다.
다시 한번 우리도 우리의 과거(601호)를 점검한다. 동주민센터에서 가르쳐 준 대로 kt 무빙인지 뭐시기인지를 통해 카드 회사 따위의 주소도 일괄적으로 다 옮겼다. 최근 택배를 시킬 때도 기존 주소지이자 기본 주소지였던 601호, 너를 지웠다. 최근 배송지에서 이제 너는 영원히 너의 자취를 감출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너의 새 주인과 연락할 일은 더 없을 듯하다.
전 주인과 주고받는 말이 그래도 '택배'라서 다행이다. 어디가 망가졌느니, 어디가 불편하다느니, 이런 문제로 연락하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다. 조금 수고를 들여야 했지만 우리가 전 주인에게 전달하는 게 ‘애로사항’이 아닌 ‘택배’여서 좋다. 택배는 기다림이니까. 기다림마저 즐거운 것이 바로 택배니까.
이참에 우리는 우리를 점검한다. 601호, 너에게 이런 실수가 도착하지 않도록 우리도 마지막 신경을 기울인다. 아마 너에게 도착하는 것은 내 과거의 기억들뿐이지 않을까?
(그런데 그나저나 낙지젓갈과 곰탕이라는 구수한 이 어휘들이 주는 느낌은 입맛을 다시게 한다. 얼마나 맛있으면 옛집에 무심코 시킬 만큼 성급히 클릭을 했던 걸까. 혹시 정기배송을 예약했던 걸까. 고것들이 얼마나 맛있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