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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Dec 29. 2020

나뭇잎이 알려 준다

이사일지 15일 차

이사일지 14일 차_죄다 옮겼지만 이사 소식은 못 옮겼다 (brunch.co.kr)







이사일지 15일 차_나뭇잎이 알려 준다




오늘 밤, 별일 없이 괜찮을까태풍이 올라온다고 한다. 코로나가 다시 증폭하는 시기라 사회적 거리두기로 2.5단계로 격상된 데다가 가을 태풍까지 전국에 빗방울을 뿌린단다. 우리는 내일 치를 거사, 곧 이사를 앞두고 걱정을 앞세운다. 새벽에 저기 저 북측으로 태풍이 올라간다고 했으니 괜찮지 않을까, 그래도 비는 많이 오는 게 아닐까.     


몇 달 전 나의 일기장을 들춰 본다. 이사를 앞두고 이런저런 걱정이 많았던가 보다. 오늘 아침에 문득 그날의 걱정이 우리의 식탁에 오른다.

     

-태풍에다 비 온대서 우리 그때 걱정 많이 했잖아.      


우리 세 식구는 601호, 네가 아닌 다른 낯선 곳에서 아침을 먹으며 낯익은 곳을 떠나던 그 28일을 추억했다. 


-다행히 큰 비는 몇 차례만 잠깐 오고 말아서 다행이지 뭐.

-그래도 엄청 더웠어. 햇볕 쨍쨍보다 습한 날씨가 더 더웠지.

-에어컨까지 안 돼서 정말 땀을 뻘뻘 흘렸잖아.

-맞아, 맞아.



-어? 지금도 비 온다?

-비 오는 게 보여?

-아니, 들려.


빗방울 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어디서 오는 소리지? 이렇게 자세히 귓전을 두드리는 것은 빗방울은 처음이었으므로 우리는 궁금해서 거실 베란다로 모였다. 


“어디서 나는 소리지?”      


이사를 오고 나서 며칠은 비가 계속 왔다. 그리고 지금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빗소리를 듣는다. 톡톡 혹은 두두두두둑. 빗방울이 누군가를 두드린다. 그 소리를 나뭇잎이 우리에게 들려준다.      


“나뭇잎 드럼 같다.”     


수십 개, 수백 개의 나뭇잎들이 가볍게 북 치는 소리를 낸다. 하늘은 보이지 않는 빗방울 북채를 쥐고서 우리의 이사를 환영하듯 공연을 시작한다.      


“여기서는 빗방울 소리까지 가까이 잘 들리네.”

“저층이라 그런가.”     



아무 음악 소리 없이도 우리는 음악을 듣는다. 조금씩 거세지는 빗방울에도 창문을 열어 둔 채 가만히 앉아 빗방울들이 어떻게 통통 튕겨 나가는지 그 모양을, 그 소리를 조용히 바라본다.      



“어. 비 그쳤나?”

“아니. 바람이 빗방울이 달라붙은 채 날려서 소리가 안 들려서 그래.”

“바람 세게 부네?”     



이번엔 바람이 분다. 점점 휘몰아친다. 자진모리 휘모리장단에 맞춰 정신없이 어깨춤을 춘다. 이곳에서는 바람에 흔들거리는 미세한 소리까지, 세밀한 움직임까지 들리고 보인다. 나뭇잎들이 이렇게 온몸으로 자연을 받아내는지를 이제야 본다.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들의 가벼움, 빗방울에 눌리는 나뭇잎들의 무거움. 그러나 아무리 바람에 날려도 쉽게 가지에서 떨어져 날아가지 않고, 아무리 빗방울에 눌려도 좀체 짓눌리지 않고 다시 제자리를 찾는 나뭇잎들. 



601호, 네 동네에서는 저 아래로 키 작은 나무가 내다 보였으므로, 혹은 저 멀리로 키 큰 나무 하나가 덩그러니 있는 모습만 보였으므로 나뭇잎들이 고스란히 빗방울을 흠뻑 마시는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다. 나무는 작은 빗방울 하나에도 온몸을 흔들었다는 것을 몰랐다. 마음이 가만히 앉아 있을 때는 그것이 때론 춤사위 같고 때론 북소리 같다는 것도 몰랐다. 마음이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어지러울 때는 나뭇잎을 두들기는 빗방울 소리가 내 마음에 휘두르는 회초리 같은 소리를 낸다는 것을, 이사를 오고서야 알았다.      



너를 떠나고서야 아는 것이 많다. 너에게 있을 때는 사람들의 우산이 비 소식을 전해 줬다면 이제는 나뭇잎 우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로 비 소식을 듣는다. 


이제 설악산은 2주 후면 단풍이 절정이란다. 우리의 계절도, 우리 집 앞 나무들도 곧 단풍이 들겠지. 좀체 집 안에서 계절을 느끼기 힘들었던 601호와 달리, 이곳에서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자연의 소리를 듣는다. 아침 식사 후 커피 두 잔과 페퍼민트 한 잔이 식탁에 놓일 때면 어느새 이곳은 저절로 어느 숲속 카페가 된다. 밤에는 가을이 꽤 깊다. 귀뚜라미가 저절로 풀벌레 울음소리로 명상을 돕는다.


이렇게 나뭇잎이 계절을 먼저 알려 준다자연이 지나가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린다. 빵빵거리는 차들이 내뿜고 가는 뒷바퀴 소리가 분진을 일으키던 601호, 너의 도시 소음. 이제 그 소리가 점점 우리에게서 멀어진다.


     

자연의 순리가, 그리고 계절의 순리가 너를 잊게 한다.




(표지출처: Delia Giandeini@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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