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가 일 너무 잘해서 좋대요^^
이전 직장에서 일할 때는 ‘일 잘한다’는 소리보다 ‘일을 왜 그렇게 하냐’는 소리를 들었다. 처음엔 아주 좁쌀만 했던 그 소리가 점점 지름을 넓히고 부피를 키우더니, 끝내는 나를 ‘퇴사’라는 험한 길목으로 밀어 넣었다. 그 소리를 키운 것이 타인이었는지 나 자신이었는지는 아직도 아리송하다. 그래도 가재는 게 편이라서, 나는 나를 두둔한다. 그만하면 지지직거리던 그 ‘인생 소음’을 잘 견딘 거라고 스스로 위로를 건넨다.
그런데 이렇게 위로 나부랭이나 들쓰고 있을 때, 문득 들려온 희한한 문장이 하나 있다.
〇〇〇가 언니 일 ‘너무’ 잘한다고 ‘너무’ 좋대요! 감사해요!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내가 ‘편집자’를 처음 꿈꾸게 한 동생이 한 명 있다. 내 친동생의 학교 동기인데, 내게 처음으로 교정·교열·윤문의 일감을 준 동생이고, 내 미천한 글솜씨에 ‘고래가 춤추는 듯한’ 칭찬을 달아 준 친구이기도 하다. 그 친구가 다시 다른 사람을 소개해 주어 내게 또 다른 일감이 들어왔고, 나는 한 차례 또 열심히 글자와 문장을 뜯어고치며 막연하게나마 편집의 일을 꿈꿨다.
아하, 나도 잘하는 것이 있긴 있구나!
퇴사 전 6개월 동안 ‘못한다’는 글자를 혹독히 낙인처럼 새기고 다녔다. 상대가 붙인 글자에 나조차도 스스로 수긍했고, 그 결말은 조금 못난 방식인 ‘퇴사’였다. 그런데 문득 돌아보니,
너, 잘한다는데?
이런 소리를 듣는 날도 분명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 삶을 제대로 ‘편집’하지 못했다. 듣기 좋은 소리만 골라 들어도 시원찮은 판에 듣기 힘든 소리만 쏙 쏙 골라 담으며, 내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부패하게 만들었다. 그 부패의 끝은 ‘썩은 내 진동’이었고, 나는 도망치듯 나의 썩은 부위를 도려내며 직장을 뛰쳐나왔다.
뛰쳐나오기 직전까지도 나는 ‘너, 잘하는 거 있다는데?’라는 소리를 철저히 외면하고 오려 내었다. ‘내 삶’이라는 편집실에서 나는 ‘퇴사’가 닥치기 직전까지 철저히 나 자신을 ‘못난 사람’으로만 편집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껏 ‘악마의 편집’을 당하는 희생양이었다. 그리고 그런 험한 가위질로 나를 오려 내 버린 당사자는 다름 아닌 바로 나였다.
이제 그 오려 둔 내 클립보드를, 그 임시 저장 공간들을 다시 열어 볼 차례다.
우선은 컨트롤 키와 씨 키, 그리고 브이 키(Ctrl+C, Ctrl+V)만 있으면 된다. 뒤지고 뒤지다 보면 세상이 나를 쓰다듬었던 순간도 있었을 테고, 내가 저 혼자 잘난 줄 알고 으쓱했던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의 순간도 몇 장면쯤은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그 장면들을 모으고 모아 ‘붙여 넣기’를 해야 할 순간이다.
여하튼 가재는 역시 게 편이라서 나는 ‘내 잘난 것’, ‘나 잘한 것’을 끝까지 한번 파헤쳐 보려 한다. 가재의, 제대로된 가위질을 믿어 보려 한다. 나는 그렇게 이 편집실에서, 나라도 내 꿈을 응원하며 내 삶을 잘 살아 내 보려 한다. 어쩌면 내 꿈을 응원하는 내 ‘꿈 팬’은 고작 가재 한 마리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신나고, 그래서 더 신난다. 지금도 가재는 게를, 즉 ‘나’를 열심히 응원하고 있을 것이다.
제일 격렬한 내 ‘꿈 팬’인 가재가 지금도 열심히 내 삶의 편집실에서 ‘게(내 꿈)’를 응원하며 내 삶을 요리조리 잘 편집하고 있다. 게의 꿈이 개꿈이든 이제 미리 재단하지 않으련다. 이제 퇴사를 했으니 늘 ‘가재’의 음성을 들으려 한다. 가재는 내게 늘 이렇게 말한다.
이보게 ‘게’ 양반, 자네는 여전히 나의 꿈일세.
‘여전히 너는 내 꿈이라서’ 나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내 안의 ‘가재’ 선생. 그러니 ‘게’의 인생, 옆길로 잘못 빠지든, 신나게 뒷걸음질을 치든 움직이는 다리만, 혹은 움직이는 마음 하나만 있으면 된다. 나의 ‘꿈 팬’인 가재가 나를 늘 지켜보며 퇴사 이후의 나를 언제까지나 진심 다해 응원해 줄 것이다. 왜냐고? 왜 ‘게’ 같은 사람한테 기대씩이나 하냐고?
그래도 가재는 게 편이고, ‘게’는 가재의 꿈이라서.
여전히 나는 나에게 꿈이고 팬이다. 아마도 나는 내 인생 최대의 팬 덕에 나의 생을 스스로 걸어 나갈 수 있을 듯하다. 집게발을 높이 올려 세상과 또 한 번 크게 싸워야 할 순간이 닥쳐올지 모르지만, 그때가 오면 다시 한번 그 세상에서 장렬히 ‘전사’, 아니 ‘퇴사’를 하고, 다음 준비된 새로운 세상으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쏙 들어가면 된다, 까짓.
이제부터 ‘까짓’이다!
여전히 나를 미치도록 응원하는 저 가재가 있으므로.
게를 신나게 응원하는 그 ‘게바보’, 가재가 내 곁에 있어 줄 것이므로,
나는 퇴사가 아주 많이 두렵지‘는’ 않다.
똑똑,
퇴로인가요?
‘퇴사’는 지금부터 내게 다음 세상으로 향하는 간절한 ‘문’이자 퇴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