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일기_그냥 두면 썩어요

퇴린이의지옥 탐구생활

by 봄책장봄먼지

“강물은 흘러야 합니다. 그냥 두면 썩어요.”


고백성사를 못 하겠다던 퇴사자의 엄마는 그해가 가기 전 다행스럽게도 고백성사를 마쳤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그리고 퇴사자 딸내미와 함께 무사히 2019년으로 넘어왔다. 그런데 퇴사자는 2019년으로 들어선 이후에도 아직 2018년의 찌꺼기를 손에 쥐고 있다. 조금쯤 남은 그 앙금의 찌꺼기는 여전히 이 퇴사자의 두 손을 끈적거리게 만들고 있다.


지금 그 퇴사자가 끈적끈적한 두 손을 들고 한 번 더 고백성사실로 들어선다. 두 손을 ‘기도손’으로 모으니 끈적함이 퇴사자 손바닥에 한층 더 들러붙는다.



"고백성사 본 지 몇 개월 되었습니다. 음……. 어……. (무슨 고백부터 해야 하지?)"

벽 너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어떠한 호흡도 들리지 않는다. 그저 이 퇴사자의 다음 고백을 기다리는 신의 대리자가 있을 뿐이다. 퇴사자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어휘를 적당히 고르고 조심스럽게 입을 뗀다.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


“미움 같은 건 모조리 끝난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습니다. 또 용서라는 감정은 생기지가 않아요. 이게 용서를 해야 하는 일인지 용서를 받아야 하는 일인지도 잘 모르겠고요. 작년에 직장 동료와 갈등이 있었습니다. 저를 참 많이 힘들게 했습니다. 한동안 저는 못난 사람으로 지냈어요. 그 사람은 제가 저 스스로를 못난 사람으로 취급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어쩐지 용서라는 마음이 좀처럼 들지 않습니다. 이미 퇴사까지 했는데도요.”


퇴사자는 격자무늬로 가로막힌 창 너머 허공에 대고 지난 몇 개월을 고백한다. 성탄절 판공성사 때에도 비슷한 고백을 했었는데 아직도 질척이며 그 고백을 이어 가고 있다. 여태 헤어 나오지 못한 이 퇴사자를 두고 과연 신은 인내를 택할까, 거절을 택할까.



강물은 흘러야 해요. 흐르지 않으면 계속 쌓여요.

썩습니다.


보내 주세요. 퇴사하셨다면서요? 이제 안 보잖아요. 더는 볼 일 없습니다. 잘 가라고 해 주세요. 그냥 너는 너대로 잘 살라고 해 버리세요.

흘려보내야 강물이 깨끗해집니다.

그냥 두면 썩어요.



완벽하게 떠나왔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감정이든 ‘완벽하고 깔끔한 뒤처리’는 쉽지 않은가 보다. 미움이 아직 덜 끝났다는 건 ‘마음이 끝나지 않았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지금 퇴사자는 아직 그 ‘마음’이란 것이 살아 있다. 살아 있어서 그런지 아직까지 용서도 뭣도 쉽지가 않다. 용서는 결국 상대에게 속한 감정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속한 감정이다. 게다가 ‘용서는 상대를 위한 감정이 아니라 오롯이 자신을 위해 행해야만 하는 감정’이다. 어쩌면 ‘미움의 마지막 단계’는 ‘용서’일지 모른다. 누군가의 말대로 과거의 강물이 흘러가야만 그다음 감정이 미래의 강물로 흘러들어 갈 수 있으리라.



그런데 나는 여태 쑤신다. 흘러가야만 하는데도 아직 나는 지난번 맞은 자리가 욱신거린다. ‘때린 사람은 발 뻗고 못 자도 맞은 사람은 발 뻗고 잔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과연 정말 그럴까? 굳이 나누자면 나는 ‘맞은 사람’ 축에 속한다. 그런 나로서는 이 명제를 반대로 재해석할 수밖에 없다. 사실 당한 사람이 더 오래 그 맞은 상황을 조목조목 잘 기억한다. 때린 사람은 발을 뻗고 못 잔다지만 아마도 상대는 발을 뻗고 쿨쿨 편하게 잠을 청하고 있으리라. 퇴사자의 용서 따위는 결코 바라지도 않으면서.


그러나 내가 찾아간 신은, 신의 대리자를 통해 자꾸만 내게 이렇게 말하려 든다.



강물은 흘러야 합니다.



나의 강물은 아직 흐르지 못 한 채 한곳에 머물러 있다. 흐르기 위해서는 조금 더,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혹여 시간이 내 이 ‘못된’ 미움의 감정을 설령 용서해 준다고 해도 굳이 나를 용서해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용서’라는 마음을 내 안에 들이지 않으려 하자, 세상이 다시 따끔거리는 말투로 내게 말을 잇는다.


그냥 두면 썩는다니까요!


그렇다. 그냥 두면 썩는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쩌면,




아주 천천히 썩고 있다.




아직 내 강물은 술술 흐르지 않는다. 내 마음은 느린 속도로 썩어만 간다. 이 ‘썩은 내’ 진동하는 토양에 반년어치의 내 마음이 묻히고, 썩고,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중이다.



상처는 그냥 두면 썩는다.

그래도 그냥 두어야만 하는 시간이,

천천히 썩어야만 하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 내 감정은 잘도 썩어 간다. 얼굴을 찌푸리게 만드는 이 썩은 내에 나는 결코 코를 막지 않으리라. 이 썩은 상처가 내 대지를 옥 같은 토양으로 만들 날을 아주 아주 천천히 지켜보리라. 자꾸 들추면 덧난다. 그러니 아주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잘 삭히며 살아가리라.



그렇다. 나는 지금 꽤 잘 썩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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