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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Dec 26. 2023

이건 아닌데

아닌데 싶을 때는 아닌 걸까요

오늘의 글쓰기를 두서없이 쓰다가(책 '아무튼, 메모'를 읽고 조금은 거창하게 독후감을 써 보려다가 실패) 이건 아닌데 싶었다. 말이 안 되잖아. 말이 안 되니 글이 안 되잖아.... 오늘이 1시간 몇 분밖에 남지 않은 지금, 매일 글쓰기 6일 차, 포기해야 하나.. 남은 시간은 제멋대로 카운트 다운을 시작하고. 

하, 계속 이 주제로 써, 말아?


그래, 말자.


이건 아닌데 싶을 때는 일단 중단하는 게 맞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차라리 '이건 아닌데' 싶은 순간들에 관해 쓰는 게 더 현명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닌데' 싶은 순간들이 많았던 나에게는 외려 이 주제가 더 선명하고 신속할 듯했다.


자, 이건 아닌데 싶었던 순간들, 

특히 올해 2023년의 '이건 아닌데' 순간들을 호명해 본다. 하나씩 내 앞으로 불려 나올 후보들을 모아 보고 시상식을 거행해 보자.



후보1_올해도 하실 거예요?

올해도 프리랜서 우리말 강사로 합류하실 거예요,라는 물음이었다.

나는 올해 초, '아닙니다.'라고 했어야 했다. 앞에 나서기를 극도로 꺼리는 내가 학생들을 앞에 두고 온갖 생쇼를 하며 우리말을 가르치는 프리랜서 강사로, 벌써 몇 년째 엉겁결에 그 바통을 이어 가고 있다니. 원래 병행하던 일보다 수익이 더 많아 버리니, 이걸 관둘 수도 없고.

하지만 어쩌면... 내년에도 다시 '네, 할게요'라고 말한 후 이게 아닌데, 이건 아니었는데, 할지도 모르겠다.

(하, 이런 나, 이건 좀 아닌데.)



후보2_맞아, 내 인생도 참 갑갑하잖아

친구들이 암흑기를 보내고 있던 터라 나는 어떤 말이라도 주워 들고서 그녀들을 위로해야 했다. 그때 튀어나오던 말이 저거다. 내 인생도 갑갑하잖아, 나도 별로잖아, 나도 희망이 없잖아. 자, 어때, 친구들? 위로가 좀 됐어?

이런 식의 위로를 참 많이 했던 2023년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실, 노란색, 하늘색 인간이다. 다시 말해 회색이 다가와 나를 뒤덮더라도 잠시만 머무르게 한 후, 이내 내보내 버리는(혹은 내다 버려 버리는),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 유형의 인간이다. 그런데 친구들의 회색빛을 위로한답시고 나 스스로를 회색으로 가두며 나의 생에 '무엄하게도' 절망과 좌절의 빛을 내리 쏘았다.

이건 아닌데. 남들 위로하자고 나의 어두운 무의식을 굳이 꺼내서 내 영혼 구석구석에 그 좌절 쓰나미를 일부러 풀어헤칠 필요가 있었을까?

그래, 이건 아니었다. 2024년에는 다시 노란색 혹은 하늘색 인간으로 돌아가리라~! 나 돌아갈래~!




후보3_선생님, 돈 좀 빌려주세요. 5만 원만, 아니 10만 원만요

청소년들과 뒹굴던 시간들이 있었다. 복지관에서 일하던 때였다. 당시 중학생, 고등학생이던 그 친구들이 지금은 스물을 넘겼고 서른을 향해 가는 이들도 있다.

아직 나를 기억하고 안부를 물어 주는 고마운 녀석들이 있는데, 가끔은 그 안부의 끝이..


"쌤, 죄송한데요. 폰이 사망했어요. 5만 원만요."

"쌤, 제가 병원을 가야 하는데요."

"쌤, 교통비가 없어서 지금 걸어가고 있어요. 3만 원만요."

"쌤, 월세를 내야 하는데."


이런 문장들을 자주 접하다 보니, 나의 사랑스러운 청소년인데도 나는 올해 꽤 모난 마음을 품곤 했다. 왜 자꾸 나에게 돈을 가져가는가. 갚는다지만 갚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고, 또 갚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되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나의 돈들.

올겨울 성당에서 고백성사(판공)를 하며 '미움'이라는 주제로 여러 에피소드를 엮어 내 마음을 신부님께 털어놓기까지 했다. 

"하느님과 가까이 있지 않으면 영혼이 지쳐요. 그래서 그래요."

네. 알겠습니다. 알긴 알겠고 나 역시 '가까이 그분을 둬야지!" 다짐을 했지만 자꾸 내 지갑에서 돈 새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닌데, 싶다. 




자, 여기까지가 후보 발표다. 세 개의 후보가 각축을 벌인다.

올해 내게 온 '이건 아닌데' 이야기 가운데 어떤 이야기가 최고로 '이게 아닌데' 였을까.



그 수상자는...

흠.. 근데 이건 당장 정할 수가 없을 듯하다. 후보1은 내게 먹고살 만큼의 돈을 조금이나마 보태 주었고 후보2는, 최소한 친구를 위로하려는 의도만큼은 비난할 수 없겠고, 후보3은 그들만의 딱한 사정이 있어서였다. 내가 넉넉했다면 아마 용돈으로라도 성큼 주었을 돈이었을 테지.



고로, 이 시상식은 내년으로 미뤄야겠다. 

과거의 일들은 한참을 지나고 나야 미래가 된다. 현재로서는 과거의 '이건 아닌데'를 함부로 판단할 수가 없겠다. 올해의 '이건 아닌데' 순간들이 '그래, 이거였어!' 하는 순간들로 바뀔지 아니면 '역시 이건 아니었어'의 상태 그대로 남을지 아직은 그 셈을 제대로 헤아릴 수가 없다.



그저,

2024년에는 부디 '이게 맞았어!' 하는 순간들이 많기를 바라며,

얼마 안 남은 2023년의 하루하루들을 소중히 닫아 보는,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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