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책장봄먼지 Feb 04. 2024

귀여운 행운

귀여우면 몸서리를 친다. 그래서 쌍둥이 조카를 보면 정신을 놓거나 잃는 편이다. (지금은 키가 거의 나만 해졌는데도 여전히 귀여워서 미치겠다.)


조카들 말고도 나에게 귀여움을 던져 주는 이들이 또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맞닥뜨리는 이 귀여움은, 비록 관찰자의 시선이긴 하나, 종종 나의 카메라에 풋풋하게 담기곤 한다. 바로 고양이, 줄여서 괭이.


고양이를 쓰다듬어 본 적은 거의 없다. 친구네 집에 놀러 가서 고양이에게 츄르를 먹여 준 적은 있다. 친구가 자꾸 안아 보라고 권하였지만 평소 강아지를 주로 애정했던 나에게는 낯선 일이었다. (누구든 잘 안아 버리는 나이긴 한데 어쩐지 고양이는 '착 붙는' 느낌이 좀 덜했다.) 아직 고양이의 매력 및 마력을 깨치지 못했나 보다. 이런 나에게도 고양이와의 소소한 인연 몇 개쯤은 있다.



어느 겨울, 김밥을 들고 공원 옆을 지나다가 검은 고양이를 마주친 적이 있다. 내 생각이지만 우린 분명 눈이 마주쳤다. 잠시 후 녀석이 나에게 다가오는 부드러운 기척이 느껴졌다. 아는 사람을 만났다는 듯한 반가운 발걸음이었다. '응? 저 고양이, 나를 아나?' 하지만 이내 곧 깨달았다. 내가 손에 들고 있던 김밥의 온기에서 풍기는 냄새. 녀석은 그 냄새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녀석은 갑자기 우두커니 선 나의 발등 위에 멈췄다. 그러고는 자신의 등을 정성껏  비벼 대며 내 발등을 침대 삼았다. 활짝 드러낸 고양이의 배는 검은 등과 달리 따뜻한 크림색이었다.



그 이후로도 '고양이 인연'은 내 주변을 심심찮게 맴돌았다. 다세대 주택에 살던 때, 2층으로 올라가던 계단에서 서로 뜻하지 않게 갑자기 마주쳐 둘 다 소리를 빽 질렀던 인연, 우리 집이 슈퍼를 운영했던 때, 자식 고양이들을 앞세워 소시지를 다량 얻어 갔던 어미 고양이와의 인연, 일하기 싫어 회사 밖을 서성이는데(소위 '땡땡이') 골목 한 귀퉁이에서 난데없이 나타나 몸을 뒤틀고 배를 벌러덩 드러내 보이며 귀여운 댄스(?)를 보여 주던 고양이와의, 나른한 오후의 인연...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이것은 인연 수준이 아니라 아마도 '우연'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연과 우연을 모으다 인연까지 만든 분이 한 분 계셨다. 다음은 그분의 이야기.



"안녕히 계세요. 마지막으로 신자 여러분께 부탁 하나를 드리려고 합니다."

바로 우리 성당의 주임 신부님. 신부님이 다른 성당으로 옮겨 가기 전에 전 신자를 앞에 두고 이런 말씀을 하신다. 부탁이라는 것은,

"신과 함께하십시오."도 아니고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와 같이 교회나 성당 앞에서 흔히 보던 문구도 아니고,

"성당 좀 잘 나오십시오"와 같은 꾸지람도 결코 아니었다.



신부님께서 우리 성당에 남긴 마지막 메시지는,


고양이를 부탁해.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성당 마당에서 '이 귀여움들(고양이)'이 신자들을 맞이한다. 때로는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자신이 신(神)인 양, 신자들의 인사를 '오냐' 하는 자세로 받아 챙기기도 한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는 구유 옆에 앉아 아기 예수님을 지켜보기도, 지켜 주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고양이를 부탁합니다." 신부님은 영적(靈的) 당부 대신 사랑을 당부하셨다. 그 당부 덕분인지 뒤이어 오신 신부님께서도 고양이에게 럭셔리한 집을 지어 주셨다.



부탁: 어떤 일을 해 달라고 청하거나 맡김. 또는 그 일거리.(출처: 표준국어대사전)



내가 언젠가 중요한 부탁을 누군가에게 있다면 나는 어떤 것을, 누구를 위해, 어떻게 부탁할 수 있을까.


만약 내가 이 동네를 떠난다면,

내가 사는 동네, 내가 살아온 모든 시간을 떠나야 한다면

나는 남은 사람들에게 어떤 부탁을 할 수 있을까.



귀여움을 부탁합니다.



엉뚱하게도 나는 이런 부탁을 남기고 싶다. 앞으로 살아가는 세상은 무조건 귀여웠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귀여움에 몸서리를 쳐 봤으면 한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좋은 귀여움들, 가령 직박구리가 감나무에서 감을 파먹는 귀여운 장면, 동고비나 박새가 땅콩 파는 아저씨 곁을 맴돌다 재빠른 비행으로 땅콩 몇 알을 몰래 가져가 버리는 장면, 딱따구리가 나무 위에서 딱딱거리다 사람들을 마주쳐도 화들짝 놀라 날아가 버리지 않는 장면...

마지막으로 이 귀여운 장면도 보탠다.


지난여름, 공원 정자에서 쉬려다가 이미 자리를 차지한 양반이 있어 슬쩍 물러 나온 일이 있다.

(고양이의 낮잠을 방해해서 죄송했지만, 그래도 고개만 슬쩍 내미는 요염한 자태를 목격한 것은 참으로 '귀여운 행운'이었다.)




세상의 모든 귀여움들이 온갖 역경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기를,

우리의 '귀여움'이 어떤 오염 속에서도 부득불 살아남을 수 있기를.



귀여움을,

꼭 좀 부탁합니다.


사제관 앞의 고양이들



 

매거진의 이전글 사슴을 향한 해답의 경로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