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안부 문자를 주고받을 때 나는 종종 나를 '건강한 돼지'로 칭하곤 한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찌고 있으니 이보다 더 착 붙는 별칭을 찾지 못한다. 종종 이리 친근한 표현으로 '돼지'라는 어휘를 사용하곤 하는데 심지어, '돼지'를 다량으로 내 위장에 투하하며 '돼지 친근감'을 넘어 '돼지 일체화'의 수준에 이를 때도 있다.
인간의 이런 친근감에 화답이라도 하듯 돼지들이 인간계로 내려왔다. 설날, 동네 친구들 단톡방에서 들은 소식이었다.
-우리 동네 멧돼지 나타났다. 긴급문자 뜨고 속보 올라옴.
이미 옛 동네를 떠난 지 스무 해가 넘었지만 내 유년 및 청소년 시절을 책임졌던 동네에 멧돼지라니! 나는 이미 서울시민이 아닌 도민이라 큰 상관은 없었지만 '돼지 소식'에 촉각을 기울였다. 아무 일이 없기를, 사람에게도, 돼지에게도.
새해 인사는 '복 많이 받아'가 아니라 멧돼지로 시작하여 '멧돼지 조심해'로 끝이 났다. (인간 입장에선 '멧돼지 조심'인데 아마도 멧돼지 입장에선 '인간 조심'이겠지.)
CCTV에 잡힌 멧돼지 6마리. 누가 잡으러 오는지도 모르는 채 그들 여섯 무리는 유유자적, 심지어 평화로운 안분지족의 모습. 마치 새로운 놀이터를 탐색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물망 사이에 코를 집어넣기도 하고 두 마리는 서로 비비적대기도 한다. 놀이터에서 저들만의 놀이를 즐기는 듯 보인다.
얼핏 보니 아이들 같다. 짬이 나 놀이터에 잠시 놀러 온 아이들처럼, 해가 질 때까지 꼴딱 놀다, 집에는 늦게 들어가고 싶은 그런 아이들처럼.
아프리카돼지열병 감염 우려로 멧돼지들은 포획 후 사살되었다. 어떤 뉴스에서는 이승에서 맞이한,그들의 마지막 모양을나란히공개하였다. 여섯 마리가 세로 열로 가지런히 눕는다. 멧돼지들의 입장에서는 뜻하지 않았을, 뜻 모를 마지막.
멧돼지들, 놀다가 그렇게 갔다. 아주 갔다.
그들은 친구 사이였을까, 가족 관계였을까.
아니, 그냥 갑자기 만나 어울리게 된 '놀이터 크루'였을까.
미처 물어보지를 못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곧 잊었다...
며칠 후, 동네 뒷산을 산책하다 '참매'로 추정되는 생명체의 비행을 목격했다. 주로 거기서 마주친 것으로 보아 그곳을 서식지로 삼는 '매'인듯 했다. 참매를 보며 문득 며칠 전 떠나가 버린 놀이터 멧돼지들을 떠올렸다.
너희들한테 날개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너희들이 감염병의 원인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우리가 가축으로 키우는돼지의 친족이, 너희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돼지를 잡아먹는 지구인이 아니었다면 너희는 지금 어디일까. 너희만의 놀이터에서 놀고 있을까?
"오늘 김치찌개 끓인다. 소고기 넣고~"
뒷산에 다녀오니 엄마의 저녁 식단이 공개된다.
"아 근데 엄마, 돼지고기가 더 맛있어, 김치찌개에는."
나는 오늘도 '건강한 돼지'가 되려고 아무렇지 않게 '돼지고기'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서 멧돼지 소식을 안타까운 척 바라만 보다가, 맛있는 저녁 식탁으로 어느새 되돌아온다. 내 식탁 위로는 또다시이런뉴스가 흘러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