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 아저씨는 나쁜 사람들을 혼내 주었어요. 그런데 우리 아가들, 이모 말 듣고는 있어요?”
아가들은 별 반응이 없다. 아직은 영웅 이야기에 큰 관심이 없다. 아가들에게 이런저런 옛날이야기를 끄집어내다 보니 홍길동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아가들에게 이야기를 해 주다 말고 문득 궁금하다.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태어날 때부터 대단한 유전자를 지녀야 한다거나 감히 범접하지 못할 비범한 능력을 보유해야만 할까? 지옥과 천당을 오고 갈 만큼의 위기와 고난을 극복한 적이 있다거나 승리를 쟁취하여 성공적인 결말을 보여 주어야만 하는 것일까?
“첫째 잔다. 잠자리 준비해라.”
하지만 어디에나 숨은 영웅은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영웅이라는 사실조차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나는 영웅들의 작은 이야기를 알고 있다.
쌍둥이 할아버지가 더운 여름, 유아차를 끌고 선선한 바람을 찾아다닌다. 땀이 할아버지의 등을 타고 흘러내린다. 등으로 따가운 햇살이 쭉쭉 내리쪼인다. 칭얼칭얼하던 아가가 “하부지? 하부지?”라고 할아버지를 찾는다. “오이야, 그래 하부지 여기 있다.” 아가는 유아차 뒤에 할아버지가 함께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제야 아가는 안심을 한다. 잠시 후, 쌍둥이 할아버지가 마침내 찾아낸 샛길, 그 선선한 길목에서 첫째 아가는 스르르 꿈나라로 향한다.
식구들은 미리 현관문을 열어 놓고 쌍둥이 할아버지와 첫째 아가를 기다린다. 아가의 고개가 유아차 밖으로 조금 삐죽 나와 있다. 꽤 심히 곯아떨어진 모습이다. 할머니는 조심스럽게 벨트를 풀고 첫째를 유아차에서 빼낸다. 그리고 그때, 둘째 조카가 할아버지가 끌고 온 유아차에 저 스스로 올라타기 시작한다. 형만 재밌는 바깥 구경을 하고 온 것으로 착각했는지 자신도 얼른 밖으로 나가려 한다. 벨트를 채우려는 시늉까지 하며 둘째 아가는 어른들을 재촉한다.
할머니와 아기 엄마는 첫째 아가를 준비된 잠자리에 살며시 누인다. 두 여자는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자칫 이 녀석이 다시 깨어날 수도 있다. 그러면 모든 게 말짱 도루묵이다. 그땐 정말이지 걷잡을 수 없이 일이 더 커진다. 되도록 조심히 ‘아가 어르신’을 끝까지 잘 모셔야만 한다.
“둘째 잔다. 자리 마련해라.”
그리고 가족 채팅방에 두 번째 알림이 뜬다. 첫째가 안방에 자고 있으므로 둘째는 작은 방에 거처를 마련한다. (한 녀석이 울면 다른 한 녀석이 덩달아 깬다. 그러면 우리 가족의 임무는 결국 실패하고 만다. 미리 둘을 분리해 놓아야 한다.) 그리고 아까처럼 미리 현관문을 열어 둔다. 둘째가 현관문 여는 소리에 잠이 깨지 않도록 빈틈없이 일을 진행해야 한다. 곧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할아버지가 유아차를 탄 둘째 조카와 함께 내린다.
유아차 안에는 온 가족의 바람대로 곤히 잠든 둘째가 보인다. 모두가 경외하는 눈빛으로 쌍둥이 할아버지를 올려다본다. 가족들의 환대를 받으며 쌍둥이 할아버지가 개선장군처럼 위풍당당 현관 안으로 입성한다. 오늘만큼은 아기 재우기의 달인이 된 할아버지. 가족들은 침묵 속에서 기쁨에 겨운 눈빛을 나눈다. 가족들에게 잠깐이나마 숨 돌릴 시간을 준 영웅, 우리의 쌍둥이 할아버지가 그 순간만큼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더 큰 우리 가족의 영웅이다. 그는 영웅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그리고 나는 이런 식으로 영웅이 된 사람을 또 한 명 더 알고 있다. 내가 아직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을, 아니 어쩌면 앞으로도 엄두를 내지 않을 일을 해낸 영웅. 그녀는 내 주변 아주 가까운 곳에 머무르고 있다.
“내 배 한번 만져 볼래?”
그 영웅이 뜬금없이 나에게 제안을 한다.
“응? (뭘 만지라고?)”
내가 목욕을 하고 러닝 차림으로 나오는 꼴도 못 보는 애다. 어쩌다가 애교를 섞어 콧소리를 방출하면 눈썹 사이에 짙은 팔자를 새기는 녀석이다. 녀석우 다름 아닌 내 동생이다. 자매끼리지만 다정히 팔짱을 끼고 다녀본 적은 없다. 집에 오는 길에 우연히 같은 버스에서 만나더라도 툭, 내 팔을 치고 지나가거나, 내릴 때나 되어서야 쓱 내 옆에 나타나는 녀석이다. 그런 동생 녀석이 쌍둥이를 담아 더 불룩해진 제 배를 내 앞에서 슬쩍 깐다. 그러고는 미래의 제 새끼들이 오순도순 자리다툼을 벌이는 자기의 태산 같은 배를 만져 보란다. 조금 튼 살도 아랑곳 않는다. 요동치는 고것들의 팔딱거림, 그것을 나보고 느껴 보라 권한다.
“느껴져? 지금 방금 움직였는데!”
2인분의 영웅을 품은 어미라는 영웅이 내게 소리친다.
“응? 어어, 그러네, 그러네.(뭘 느껴야 한다는 것인가?)”
사실 뭐가 태동인지, 뭘 느껴야 하는 건지 막상 만져 보니 당최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제 몸에 품은 생명력에 압도되어 때로는 경이롭고, 때로는 두려울 이 예비 엄마에게 무조건 힘이 되는 말을 해 주고 싶다.
“우아. 이모한테 벌써부터 반갑다고 발길질이네? (흠. 이게 발일까? 혹시 손은 아닐까?)”
우리 곧 건강하게 만나자. 두 명의 청자가 아직은 침묵 중인 동생 배에다 대고 이모라는 자는 멋쩍은 대화를 전한다. 동생은 내밀던 배를 도로 집어넣는다. 그때 동생이 이어 묻는다.
“그날 휴가 낼 수 있어?”
한창 ‘개떡’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던 터라 대답을 망설인다.
“이모를 먼저 만나는 게 더 좋단 말이야.”
이모라는 자가 쌍둥이 녀석들을 극진히 사랑하게 될 줄 미리 짐작이라도 했던 것일까? 동생은 이왕이면 자신의 아가들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우리 식구들이었으면, 그리고 이모였으면 좋겠다고 말을 한다. 영웅들이 태어나는 가장 역사적인 순간에 함께하는 것, 나로서도 커다란 영광과 감격을 껴안는 일이다.
“그래, 휴가 못 내게 하면 관두고라도 달려갈게.”
출산을 앞두고 살이 늘어나고 겁이 늘어난 동생이 안심하고 뒤를 돌아선다. 뒤뚱거리는 몸집을 하고 제 신혼집으로 향하는 영웅을 보면서, 그 뒷모습에 꼬꼬마 사내 녀석 둘을 ‘붙여 넣기’ 해 본다. 썩 잘 어울릴 것 같은 그림이다.
우리 집 최고의 영웅은 그렇게 탄생한다. 10개월 가까이 제 몸이 아닌 제 몸으로 살아가는 ‘엄마’라는 영웅들.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생명들과 이 세상에 생명을 가져온 모든 생명들은 모두 다 영웅이다. 그러므로 내 동생이 가끔 본인이 의도하지 않은 ‘짜증 고수’로 변모할 때나 ‘지적질쟁이’로 변신할 때가 있다 하더라도 그녀는 이 시대가 낳은 불세출의 영웅임이 틀림없다.
영웅의 조건은 뭘까.
태어날 때부터 대단한 유전자를 지녀야 할 필요? 없다. 감히 범접하지 못할 비범한 능력을 보유? 글쎄. 지옥과 천당을 오갈 만큼의 위기와 고난을 극복한 입지전적인 서사? 그건 위인전을 참고. 세상에 화려하게 데뷔하는 영웅이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에는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자기도 모르게 발휘하는 엄청난 영웅들이 분명 존재한다. 나는 그런 영웅들을 잘 알고 있다. 그 영웅들은 이 세상에 온 영웅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새로운 영웅들을 지켜 낸다.
그들은 때마다 분유를 타고,
그들은 이따금 아기띠를 두르고,
그들은 자주 통잠을 희망한다.
영웅은 특별한 자격증을 보유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단 1초라도 내어줄 수 있다면.
1초와 1초와 또 1초. 그 무수한 1초들을 사랑으로 채울 수만 있다면.
영웅이 되는 1초의 순간들.
어쩌면 아주 가까운 곳에 그 1초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진: Clker-Free-Vector-Images,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