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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Mar 13. 2024

나를 빌려 쓰는 인간들

“봄봄 쌤, 돈 좀 빌려주세요. 5만 원만.”

“뭔 일인데?”

“집세 낼 돈 모자라요.”

“진짜야?”

“네.”

“…….”

“제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어요?”

“어. 봤는데.”

“봄봄 쌤도 참. 아니 그건 어쩌다 한두 번뿐이고요.”

“(한 달에 한두 번은 아니고?) 그럼 언제 줘야 하는데?”

“오늘요.”

"오늘? 어이구, 알았어. 5만 원이라고?”

“5이긴 한데 10주면 더 좋고.”

“5라며?”

“갚을게요.”

“선생이 되어 가지고 어떻게 다시 학생 돈을 삥 뜯니?”

“그럼 안 갚을게요.”

“으응? 암튼 알겠다.”

“감사, 빠염.”     


한창 백수라는 이름으로 바쁜 시절이었다. 옛 직장에서 알았던 청소년들이 그래도 아는 어른이라고 이렇게 종종 다정한(?) 연락을 취해 온다. 때로는 간드러진 모습으로 문자를 남기기도 한다.

“봄봄 쌔앰~~~~~~~”

이렇게 물결 표시를 덧붙여 나를 은근히 불러댈수록 나의 위기감은 고조된다. 범상한 일은 아니리라.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

“독립하려고 하는데요, 돈이 좀 모자라요. 50만 원만 빌려주세요.”

헉. 청년이 된 그 녀석이 부르는 값은 대단도 하다. 예전 청소년 시절과는 급이 다른 액수다. 그때는 마침 내가 ‘개떡’ 취급을 받던 직장에서 막 떠났을 때였다. 다행히 수중에 남은 돈이 있었고, 그날은 카드값이 나가기 이틀 전이었다. 물론 나에게는 그 일이, 그 타이밍이 다행이 아니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청소년에게는 분명 다행인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있는 힘껏 여유 자금을 쥐어짜 낸다.

“선생님도 지금 50까지는 돈 없다. 조금만 부쳤어.”

옛 직장을 떠나온 지 2년이 지났을 때다. 그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는 선생, 아는 어른을 찾아내서 연락을 해 준 것이 고맙다. 얼마나 연락할 데가 없으면 나 같은 어른한테 기댈까, 싶기도 하다. 


청소년 기관에서 일할 당시에는, 학교에서 액자를 깼어요, 하면 액자값을 물어주고, 교복 치마가 짧아서 된통 혼이 났어요, 라고 말하면 그 친구와 함께 교복 가게로 향했다. 엄마를 만나야 하니 돈을 좀 빌려주세요, 라고 하기에 그게 거짓말인지 진실인지 묻지도 따지지 않고 지극히 ‘호구답게’ 돈을 빌려주기도 했다. 그땐 참 내가 바보 같았구나, 싶었지만 돌이켜보니 그들에게만큼은 호구여서 다행이다. 적어도 나의 그 청소년들에게 난 꽤 쏠쏠한 호구였을 것이다. 



반대로 내가 살면서 돈을 뜯은, 아니 대놓고 ’ 뜯은 인간이 딱 하나 있다. (부모님을 제외하고는 이 사람이 가장 희생양이었을지 모른다.) 바로 조카들을 내게 안겨 준 내 동생. 언니로서 먼저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가족의 어깨를 한 겹 덜어 주었어야 했건만 언니라는 자는 몇 년을 수험생으로 지냈다. 동생의 등골에서 칼슘을 몰래몰래 갉아먹었던 것이다. 


동생은 착한 척을 안 하는 ‘안 착한’ 동생일지언정 달마다 잊지 않고 언니 책상에 용돈을 두고 가는 무심한 동생이었다. (살갑지는 않았지만 ‘돈봉투’라는 인간미는 챙겨 다니는 동생이었다.) 내 첫 직장, 첫 청소년들을 만나게 해 준 것도 사실 동생이었다. 나는 동생이 건네준 채용공고를 보고 그곳에 지원하였고, 긴 수렁에서 드디어 두 발을 건져 올렸다. 처음으로 사회가 주는 돈을 받았다. 그 당시 나는 동생에게 돈도 은혜도 조금씩이나마 갚아나가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동생은 쿨하게 거절했다. 내 앞길이나 알아서 잘 가면 그걸로 자기는 됐단다. 



그래서 나는 그때 그 채권자에게 앞으로 쭉 ‘삥’을 뜯겨야 한다. 아가들과 함께 달릴 때 따라오는 ‘무릎이 쑤시는 고통’, 두 팔 들어 아가들을 불끈 껴안을 때 찾아오는 ‘어깨가 결리는 통증’, 아가들 밥 챙기느라 제때 식사 못 하고 뒤늦게 허겁지겁 먹다 얹히는 ‘위장의 체증.’ 나에게 이제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어야 한다. 동생 덕에 20대를 편히 놀고먹은 셈이다. 나는 고생을 좀 더 해 봐야 한다. 좀 더 ‘삥’을 뜯겨 봐야만 한다. 이모에게 ‘삥’을 뜯길 재력이 남아 있지 않더라도 나는 당분간 우리 조카들을 향해 체력이라도 ‘삥’을 뜯겨야 한다.


     

“봄봄 쌤, 오늘 찾아가도 돼요? 친구랑 둘이?”

“응? 무슨 일인데?”

“안 좋은 일이 있어 가지고.”

“그래? 많이 안 좋아? 애고. 근데 꼭 오늘이어야 해?”

“네.”

“휴. 알았다. ○○역으로 와.”     

나가 보니 데리고 온다던 친구가 그냥 친구가 아니라 남자친구였다. 애초에 안 좋은 일도 물론 없었다. 나는 어김없이 저녁값과 커피값을 털린다. 내가 그렇지, 뭐. 


난 내가 만난 모든 청소년에게 철저히 호구 선생이었다. 그것이 힘들게 살아가는 그 아이들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이었다. 주면서 점점 빠듯하게 야위어가는 내 지갑을 걱정하긴 했지만, 주고 나서는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없었다고 믿어 본다...) 모든 사랑을 다 퍼 주고서 헤어진 여자는 이별 후에도 후회와 미련이 없는 법인가 보다. 


나의 청소년들에게 자발적으로 ‘삥’을 뜯겼듯이, 조카들에게도 나는 이제 호구가 되고자 한다. 언젠가 우리 귀여운 아가들이 ‘이모 품 안의 조카들’에서 ‘세상 품으로 당당히 발자국을 떼는 조카들’이 될 때, 그때까지 이 이모는 후회도 미련도 남지 않는 사랑을 줄 생각이다. 그들에게 마구잡이로 ‘삥’을 뜯길 예정이다. 


오늘도 나에게 돈을 빌려 간 인간들에게, 그리고 나의 사랑을 먹고 도망가는 여러 사람들에게 나는 기꺼이 내 짝사랑을 내어 준다.      


어떤 이모에게는,

짝사랑도 ‘삥 뜯기기’도 현재 진행형이라고 한다.     



(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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